고시카게
눈이 왔다. 수업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창밖의 하얀 눈송이들은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그저 다시 하품을 할 뿐이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그 무엇에도 영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물론 배구야 예외였지만. 그러나 오늘은 배구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설레야 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하늘에서는 올 겨울 처음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고, 하얀 눈으로 덮인 교정은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비록 지금 몸은 교실에 앉아 지루한 수학 수업을 듣고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어딘가 먼 곳을 떠돌고 있어야 할 그런 날이었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심지어, 오늘은 그의 생일이 아니던가. 교실 한켠에 붙어 있는 하루씩 뜯어 넘기는 달력은 뒷장이 얼마 남지 않아 너덜거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맨 윗장에 쓰여진 22라는 숫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생일이었다. 그러나 특별하다는 생각은 도통 들지 않았다. 오히려 생일이란 게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날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다만 올해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카게야마, 그날 꼭 찾아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알았지?”
일자로 잘린 새카만 앞머리 아래로 반짝이던 두 눈동자가 기억에 선명했다. 카게야마는 그 시선을 생각할 때마다 뱃속에 깃털이 가득 차 속을 간질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다지 로맨틱하지는 못한 표현이나 카게야마의 어휘로는 그 편이 최선이었다. 어쨌든 카게야마는 저를 찾아오겠다 약속하던 고시키의 당찬 다짐에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날도 아닌데, 왜 굳이 그렇게 찾아오겠다는 것인지 사실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번 12월 22일에는 네가 같이 있어줄 테니까, 조금은 특별한 날일까. 창밖을 재차 내다보는 카게야마의 귀 끝이 붉었다.
오이카게
그러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천하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사실을 고향의 친구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그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틀림없이 그런 꼬맹이랑 연애라니 파렴치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이고, 다음으로는 언제부터 그렇게 소심했냐는 놀림이 날아들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더럽게 귀여운 토비오쨩이 하필이면 저와 같은 학교로 진학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으며, 또 제게 느닷없이 좋아한다는 고백을 할 줄은 누가 알았겠냐는 말이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제가 그 고백을 받아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고는 여지껏 손 한 번 못 잡아 보다니. 오이카와의 연애 패턴을 생각해보면 지금쯤이면 키스까지는 진도를 뺐어야 했다. 그런데 손도 못 잡아봤다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어그러지는 느낌에 오이카와는 괜히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실은 두 사람 중 더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은 카게야마의 쪽이었다. 아무리 연애가 처음이라지만 주변에서 이것저것 들은 것은 있었다. 남들은 연애라는 걸 하면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한다는데 저의 연애는 어째 그런 소식이 없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제가 매력이 없어서 그런가, 오이카와가 과연 저를 진짜 좋아하기는 하는 것인가, 고민에 빠져 혼자 끙끙대다가는 결국 에라 모르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것이 카게야마의 매일 밤이었다. 온갖 생각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생활을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내는 카게야마에게 동기들이 제안한 술자리는 제법 매력적이었다. 술을 마시면 잊을 수 있다던 어느 영화의 대사를 떠올린 그는 결국 그날 저녁 처음으로 과음이라는 짓을 저질렀고, 앞에 있는 게 술잔인지 물잔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내가아, 진짜 답답해서어... 무너지는 발음으로 뭐라 중얼거린 그는 손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카게야마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오이카와 씨, 왜 나랑 손 안 잡아요?”
빵, 폭탄이 터져버렸다.
츠키카게
소년들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애써 의식하지 않는 척 옷깃을 여몄다. 날이 제법 추웠다. 카게야마는 새빨간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입을 열었다. 왜 보자고 했냐. 그 말에 츠키시마가 고개를 돌려 저를 빤히 보는 것을 알아채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눈을 마주칠 자신 또한 도저히 나지 않았다. 몰라서 물어, 왕님? 얄미운 어조인 것은 분명했으나 그 안에 담긴 애정 비슷한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괜히 귓가가 발갛게 물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추우니까 어디 좀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다. 웬일로 나름 다정한 말을 하기에 카게야마는 결국 츠키시마를 슬쩍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저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 응시하던 츠키시마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며 평소의 모습으로 틱틱대었다.
“아, 왕님은 바보라 감기 같은 거 안 걸리나?”
“뭐?”
꼭 저런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지. 카게야마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츠키시마는 그런 카게야마를 재차 빤히 들여다보더니 문득 팔을 뻗었다. 느닷없이 손에 느껴지는 온기에 카게야마는 당황스러움을 얼굴에 한가득 담고 츠키시마를 올려다보았다. 이래도 돼? 카게야마가 입모양으로 묻는 것을 츠키시마는 못 본 척 했다. 이러다가 누가 보면 어떡하냐는 물음은 츠키시마의 볼이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본 카게야마의 입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맴돌기만 했다. 제대로 본 것일까, 아니면 조명 탓일까. 츠키시마의 손 안에 잡힌 카게야마의 손은 몇 번 꼼질거리다가 잠잠해졌다. 이렇게 급작스런 스킨십을 밖에서 시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늘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치기만 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모두가 사랑하는 날이니, 조금은 티를 내도 되지 않을까.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츠키시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거리의 알록달록한 장식들과 조명들 사이에서 울려퍼지는 것은 온통 사랑, 사랑이었다.
쿠니카게
자취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쿠니미가 찾아올 때면 카게야마는 그를 문 앞에 세워두고 다급하게 방을 정리하기에 바빴다. 정리라기보다는 발을 디딜 틈을 만드는 작업에 가까운 일이 끝나면 그제야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들어와, 한 마디를 간신히 던지는 것이었다. 카게야마의 작은 방 안을 둘러본 쿠니미는 정리 좀 해, 따끔하게 잔소리를 내뱉어 보았지만 카게야마가 들을 리 없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너랑 나랑 있기에는 충분하잖아. 무덤덤하게 말하는 카게야마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본 쿠니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말, 아무렇지 않게 잘 하네.”
“어?”
“아니야.”
왜, 뭔데. 입술을 비죽이며 뚱한 표정을 짓는 카게야마를 잠시 바라보던 쿠니미는 대답 대신 입맞춤을 선사했다. 부드러운 입술 위로 포개진 또다른 입술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뒤죽박죽, 타액이 엉망진창으로 섞이는 제법 강렬한 입맞춤은 한참을 계속되다 끊어졌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본 쿠니미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부끄러워해? 우리 이런 거 하러 온 거잖아. 마치 오늘 날씨가 좋았다는 말을 하듯 한 치의 떨림도 없는 목소리에 카게야마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그렇지만... 여전히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카게야마에게 쿠니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전에? 카게야마가 끝맺어지지 않은 쿠니미의 말에 의아해 할 무렵, 문득 그의 볼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생일 축하해.”
마지막 축하는 내가 해주고 싶었어. 쿠니미의 말에 카게야마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11시 59분이었다.
쿠니카게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가 가진 것은 절망이었고 우울이었으며 그는 간혹 삶이 버거워 비틀거렸다. 발자욱은 어지러이 흐트러져 이곳저곳에 상처를 남겼으나 가장 상처받은 이는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걸음에서 방향성만은 확실했고 그의 행선지는 종말이었다. 나는 모든 것이 끝장났으면 좋겠어, 모든 것이 내게 상처를 주니까. 습관처럼 중얼거리는 입술은 까지고 벗겨져 핏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아릿한 어둠을 헤치고 걷다 보면 폐허에는 아침이 왔고 그러면 그는 다시 탐색을 시작했다. 망가지고 무너진 것들의 잔해 위로 햇살이 내리쬐었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은 제법 보기 좋았지만 그의 기분을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제가 찾는 것이 아닌 것들에게 할애할 시선은 없었다.
그는 소년과의 첫 입맞춤을 상기했다. 부드러운 입술 틈으로 혀를 들이밀었던 기억, 서툰 몸짓에마저 애정이 넘치던 그 순간을 다시 머릿속에 불러왔다. 그러면 분명히 소년이 살아있으리란 믿음이 생겼다. 그토록 달콤한 것을 선사하고 가버린 소년이 반드시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으리라는, 그런 막연한 믿음이. 그는 소년에게 느꼈던 감정을 재차 불러오며 눈을 깜박이고 맨손으로 콘크리트 더미를 뒤졌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나의 토비오. 세계가 무너지던 오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던 그 두근거림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는 일은 이제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소년을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으나 그의 중얼거림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카카게
음식점의 분위기가 제법 왁자했다. 신입사원이 들어온 이후 첫 회식이었다. 아직 젊으니까 팔팔하지? 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부장이 건네는 술잔을 우리의 신입 카게야마 토비오는 거절도 하지 못하고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카게야마 씨, 괜찮아요? 카게야마의 등장으로 졸지에 막내를 탈출한 옆자리의 여사원이 묻는 말에도 그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고갯짓이 영 똑바르지 못해 그가 취한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부장이 먼저 가보겠다며 일어나서는 마지막이라고 준 또 한 잔의 술마저 받아 마신 그는 결국 부장이 식당을 나서자마자 식탁에 코를 박았다. 어어, 카게야마 씨! 아이고, 우리 신입 취했네. 걱정이 섞인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지만 섣불리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 카게야마 씨 집 아는 사람 없어요?”
그 와중에 스르륵 일어나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팀장 아카아시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자연히 한숨을 푸욱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없어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튀어나오지 않자 아카아시는 저벅저벅 걸어 카게야마의 옆으로 다가갔다. 카게야마 씨, 괜찮아요? 묻는 말에 카게야마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 어쩐담, 아카아시는 일단 카게야마의 한쪽 팔을 잡아 어깨에 걸치고는 일으켰다. 말랐지만 키가 크다보니 지탱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간신히 카게야마를 완전히 일으키고는 제가 데려다 줄 테니 이쯤해서 파하자는 말을 꺼냈다. 동의를 표하는 일행들을 뒤로 하고 아카아시는 카게야마의 허리를 잡았다.
“집 어디예요?”
“모올라요오...”
아, 이걸 정말 어쩐담. 잔뜩 취한 짝사랑 상대를 집에 데려다줘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아카아시는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식당을 나서 제 차 조수석에 카게야마를 앉혔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죠. 카게야마가 듣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에게 행선지를 알린 아카아시는 저라도 제정신인 것을 애써 다행이라고 여기며 운전석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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