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HQ

[시라카게] Artificial Love

톨쟌 2017. 11. 12. 18:51


Artificial Love

치사량을 넘긴 애정








안온한 일상이란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시라부 켄지로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기실 그는 저의 별 볼일 없는 인생이 어떻게든 엉키고 또 엉키게 될 것 역시 익히 알고 있어서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가 그 불운한 운명을 깨달은 것은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였는데, 그건 사실 그렇게 이른 나이는 아니었다. 평화 보육원에서는 열 살이 넘으면 대개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알게 되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는 외려 조금 늦은 편이었던 것이다. 거기선 탈선이 일반적이었고 나이가 들수록 어둠에 점점 가까워졌다. 고교를 졸업해 보육원을 떠난 후엔 제대로 된 직업을 갖는 이가 몹시 드물었고 대부분 뒷골목으로 빠져 싸구려 깡패 짓이나 하게 되었다. 사실 고교 진학률도 높지 않았는데, 그건 중교마저 중퇴하고 일찌감치 암흑으로 발을 들이미는 인원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는 뼛속까지 침투해 골수를 빨아먹는 악운에 반항할 기운도 없이 다섯 해를 더 살았고 고교 2학년이 되었다. 그는 그게 무척 무의미한 짓이라 생각했고 하루빨리 업을 찾아 떠나고 싶었으나 상황은 의지와 다르게 흘러갔다. 혹은 아주 반대 방향으로 가버렸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 해에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고 그는 그것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시라부 켄지로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만나게 되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평범한 고교 1학년생이었다. 사실 평범하다는 수식어는 그와 조금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었는데, 그건 그의 사교성이 퍽 떨어지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선적이었고 제멋대로였으며 남들의 눈치를 볼 줄을 몰랐다. 그런대로 반반한 외모 덕에 그에게 접근하는 이의 수는 적지 않았으나 모두 삽시간에 떨어져 나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남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으며 따라서 남이 다가올 때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입에서는 짧고 날카로운 말들만이 담담히 떨어졌고 손발은 굳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가 원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론적으로 그건 그의 잘못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그에게 점점 당연한 일이 되었고 고교에 입학한 후에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시라부가 그의 인생에 개입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처음에 시라부는 제가 카게야마를 만나게 된 것이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여느 때처럼 구석진 화장실에서 담뱃불을 붙이던 중이었고 누가 거기에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거긴 좋지 못한 소문이 도는 놈들이 들락날락하며 온갖 불법을 꾸미는 장소로 유명했고 평범한 애들은 발을 들일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방과 후의 늦은 오후였으므로 불량한 녀석들이 학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사실 그도 그곳에 있을 만한 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필 그날 오전에 또 지각을 한 탓에 교무실에서 온갖 잔소리를 들었고 풀려난 것이 그 시각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맞물려 그는 그 오후에 무방비하게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거기로 발을 들인 신입생 카게야마와 마주쳤다. 극히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었다.


시라부는 처음에 카게야마가 저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고 파악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발을 들일만한 보통 애는 없었고 카게야마는 그런대로 사나운 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라부는 카게야마를 한 번 흘긋 바라보고는 제가 하던 일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그게 거기의 규칙이었다. 다른 사람이 뭘 하는 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그러나 입학한 지 몇 주 되지도 않았고 정보를 얻어 들을 만한 사람도 없었던 카게야마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거기가 뭘 하는 곳인지 알지도 못하고 들어왔으니. 그러니 그가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고 있는 시라부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카게야마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담배 피워도 돼요?”


쿨럭이는 기침 소리와 함께 시라부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가 축축한 타일 위로 툭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조금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시라부는 그걸 줍는 게 폼이 나지 않는 일임을 알았으므로 대신 카게야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인지, 웬만한 건 다 아는 미친놈인지 분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관찰력이 좋은 편이었으므로 카게야마의 조금 불안정한 눈빛과 어색한 자세를 보고는 사태를 파악했고 당장이라도 주먹을 뻗으려던 것을 애써 눌러 참았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지?”

“하지만.”

“뭘 좀 모르나본데, 여긴 너 같은 애새끼가 올 곳이 아니야.”


그러고는 담뱃갑을 찾아 한 손으로 뒷주머니를 더듬었으나 이내 방금 전에 떨어뜨린 게 돛대였음을 기억해냈다. 젠장, 낮게 욕지거리를 한 시라부는 곧 세면대 쪽에 얹어두었던 가방을 챙겨 거길 나섰다. 괜히 카게야마의 어깨에 몸을 부딪히기까지 했다. 제대로 쪽을 당한 기분이었으나 어차피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므로 상관없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카게야마가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다음 무효해졌다.


“왜 따라오냐?”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인 건데요.”

“씨발, 따라오는 거 맞잖아.”

“정말 아닌데요.”


차분한 듯 어색하게 이어지는 무미건조한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서는 현관을 나서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통과할 때에도 카게야마는 여전히 그의 등 뒤에 있었다.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것에 그는 짜증이 있는 대로 나서는 결국 뒤를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따라오지 말라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저희 집도 이 쪽인데요.”


이쯤 되면 시라부도 포기할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카게야마도 저희 집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침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잠잠히 걸었으며 카게야마 역시 별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갈림길이 나왔다. 시라부는 아무렇지 않게 앞서 가다가 카게야마가 발걸음을 멈추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카게야마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는 걸 본 그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다. 카게야마는 잠시 그렇게 시라부를 보며 입을 벌릴지 말지 고민하는 모습을 하다가 곧 목소리를 내었다.


“저희 집은 왼쪽입니다.”

“그럼 그 쪽으로 가. 난 오른쪽이야.”

“네.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는 정말 왼쪽으로 방향을 돌려 걸어가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기억 한 구석에 저장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시라부는 곧 그 생각을 털어내고 오른쪽으로 발을 떼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 남은 기묘한 진동은 벗지는 못했는데, 그건 그가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도 둘은 간혹 마주쳤다. 점심시간의 복도나 하굣길의 운동장에서처럼, 하나같이 우연했으나 시라부의 마음속에는 묘한 감정이 차차 쌓이고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것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다만 카게야마를 볼 때마다 뱃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어질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그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그는 그래서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조금 겁을 먹었는데 그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비난받을 일도 부끄럽게 여길 일도 아니었으나 그는 그것을 아주 열심히 숨겼고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꽁꽁 감쌌다. 그게 언젠가는 터져 나올 것을 그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 전에 그것을 풀어놓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걸 단순한 거슬림 정도로 해석했기에 더더욱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는 정말 우연한 일을 계기로 시작된 기이한 현상을 그렇게 묻어두려 애를 쓰며 많은 날들을 보냈다.


그 날들에 종말이 온 것은 그가 다시 그 갈림길에서 머뭇거리게 되었을 때였다. 그건 또다시 어느 늦은 평일 오후였고 따라서 그가 거기서 그렇게 얼쩡댈 시간은 아니었다. 그가 그 때에 그 곳에 있었던 것은 정말 순전한 우연이었다. 그는 그 날 무단으로 결석하고 시내를 쏘다니다 가진 돈이 떨어져 보육원으로 걸어서 돌아가던 참이었다. 원장이 간혹 좀 큰 녀석들에게 쥐어주는 소액의 용돈은 그의 방황에마저 한참 모자랐다. 해가 지기도 전에 돌아가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것은 전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건 아주 자발적인 행동이었고 아무도, 심지어 그 자신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일말의 기대감 탓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수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그는 거기서 무언가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건 곧 그가 거기서 카게야마를 또 한 번 마주친 것은 전혀 예측되지 못한 일인 동시에 또 하나의 우연과 같이 보이는 일이었다는 뜻이었다.


카게야마는 수수께끼 같은 얼굴을 하고는 시라부의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 뜬 그 무미건조한 표정을 해석하는 것은 시라부가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또한 일전의 그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다시 그를 습격하고 있었으므로, 시라부는 다만 거기에 서서 그를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아주 쉽게 시라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접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관찰이었다. 그는 제 얼굴은 정말 알 수 없이 만들어 놓고서는 시라부의 눈짓과 그 안에 담긴 소용돌이는 온통 헤집어놓고 있었다. 적어도 시라부는 그렇게 느꼈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 자명했지만. 그렇게 둘 사이에 느슨하지만 동시에 팽팽한 적막이 흘렀고 카게야마의 푸르른 시선은 멈추는 일 없이 시라부의 얼굴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둘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있었는데, 그 참을 수 없는 시간을 깨고 언어를 풀어놓은 것은 의외로 카게야마의 쪽이었다.


“선배."

“…뭐.”


언제 봤다고 선배인지, 쏘아 묻는 것보다는 조금 차분한 대답이 나갔다. 물론 거기에도 상당한 적의 비슷한 것이 묻어있었으나 시라부의 입장에서도 도저히 무언가 생각해서 대꾸할 정신이 들지 않았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기실 그는 더 이상 그가 뱉은 말에 포함된 것이 순수한 적의인지 악의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눈을 뜨면 카게야마가 있었고, 눈을 감아도 그가 있었다. 곧 세상이 카게야마였고 카게야마가 세상이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끔찍하기도 했다. 그건 그가 낯선 것을 아주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뻔하게 탈선하는 삶을 살았고 당연하게 이탈하며 숨을 쉬었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증오했으므로 그는 그 상황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 시간과 공간과 카게야마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도저히 애정 어린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카게야마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보면서 명치 즈음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요.”

“왜?”

“모르겠어요.”

“착각이야.”

“네.”


스스로도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분노가 치밀었다. 시라부는 카게야마가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동시에 아주 잘 알 것만 같았다. 분명히 자신이 겪는 그 이상한 증상들과 관련 있는 말일 터였다. 이제야 뇌가 기능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생각이 흐르다가 점점 속도가 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의식은 점차 온갖 생각들이 엉키는 소용돌이 속으로 스며들었다. 손끝이 떨리고 무릎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까의 분노는 이제 그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아니, 그게 분노였나? 분노가 맞나? 제 안의 그 격정을 스스로도 분간하지 못하는 데에서 더 큰 혼란이 왔다. 그 와중에도 파랗고 검게 가라앉은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시야에 똑똑히 박히자 그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애가 저렇게 차분할 수 있는 건, 시라부 켄지로 자신이 겪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비난조의 의문문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답을 받을 수 없다는 건 그도 내심 알고 있었으므로.


“너 대체 왜 그래?”

“뭐가요?”

“너도 다 알잖아.”

“제가 뭘요?”

“씨발, 알잖아!”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애써 참아내었다. 그보다 더한 충동이 숨을 조이며 기도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 어떤 것보다도 비이성적이었고 그 즈음엔 시라부도 조금 제정신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대신 시라부는 날선 눈짓으로 카게야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에게 답을 듣고 싶어 하는 표정인 것 같기도 했다. 그걸 빤히 보던 시라부는 문득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져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차라리 그 곳을 떠나는 게 가장 옳은 해결책이라 느껴졌다. 오른쪽으로 발을 디디며 그는 방금 전의 충동을 의식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리눌렀다.


그러니까, 입을 맞추고 싶다, 하는 그 충동을.


사실 답은 처음부터 뻔했다. 시라부 켄지로가 카게야마 토비오를 만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건 아주 필연적인 일이었다. 둘은 어떻게 되어서든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이 무엇인지도 아주 분명했다. 다만 부정하고 싶을 뿐이었다. 철저하게 부정하며 더 이상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는 걸음마다 힘을 실었다. 자꾸만 그 갈림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렁이는 것을 밟아 없애고자 하는 의도였다. 절대 돌아갈 수 없었고, 돌아가선 안 되었다. 그 알 수 없는 격정이 치사량을 넘어섰다는 걸 직감한 이상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그 감정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초과했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은.


느릿느릿, 등 뒤로 해가 졌다. 돌아볼 마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