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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제왕, 그리고.

톨쟌 2016. 3. 17. 13:05



[오이카게] 제왕, 그리고






   “카게야마 왕자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난스러운 듯 비꼬는 것이 여실한 그 말투에 카게야마의 눈매가 매섭게 오이카와를 노려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눈을 곱게 접어가며 생글생글 웃는 오이카와의 모습을 보며, 카게야마는 그가 그 무자비한 제왕이라 불리는 인물이 맞는지 순간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의 칼 아래에 무릎을 꿇었던 부왕의 뒷모습이 다시금 눈 앞에 선명해지자,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카게야마는 현실을 자각했다. 그의 조국은 이제 한낱 처량한 속국에 불과했고, 한때 한 나라의 왕이었던 그의 아비는 자존심도, 명예도 짓밟힌 제왕의 종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 자신은,



   “토비오라고 불러도 괜찮겠지?”



   제 앞에서 해사히 웃고 있는 제왕 오이카와 토오루의 손아귀 속 장난감이었다.



   북국의 제왕 오이카와가 남색이라는 소문은 이미 주변국에 익히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모두가 쉬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소문. 그러나 아무도 그 진위를 판별할 수 없었기에 소문은 그저 소문이라고만 치부될 따름이었다. 게다가 세상의 그 어떠한 여인이라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용모를 가진 이가 남색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기에, 소문은 곧잘 반대 세력의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라는 이름을 달곤 했다.



   하지만 이제, 카게야마는 그 소문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제왕이 저를 자신의 침실로 데려온 것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또다시 아찔해지는 정신에 카게야마는 눈을 꾸욱 감았다가 느릿하게 떴다. 오이카와의 갈색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이 무섭도록 처량해 보여, 카게야마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싱긋 웃으며 카게야마에게 손을 뻗었다. 눈에 띄게 움찔하는 왕자의 모습에, 제왕은 살살 입맛을 다셨다. 귀엽네, 왕자님.



   “토비오, 뭐가 그렇게 두려워?”



   아까와는 달리 묘하게 다정해진 목소리였지만, 카게야마는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제왕은 위험하다. 오이카와를 바라보던 검푸른 시선이 침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불만족스럽다는듯이 표정을 살짝 굳히고는, 손을 다시 뻗어 카게야마의 턱을 부여잡았다. 억지로 고개가 들린 카게야마의 눈동자 속에 다시 오이카와가 담겼다. 비릿하게 한 쪽 입꼬리만을 올려 묘한 미소를 짓는 오이카와를 보며, 카게야마는 공포와 모욕감,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제 얼굴에 담아내었다.



   제 조국을 무너뜨린 이가, 제 아비를 짓밟아버린 이가 이제 저 자신마저도 가지려고 하고 있었다. 모욕적인 언사를 던지고, 강제로 저를 다루려고 하고 있었다. 한때 왕자였던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대우였다. 아무리 그가 정복자이고 제왕이라도, 아무리 제가 속국의 왕자이자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조금의 냉정을 되찾자 오이카와의 행동에 반발하는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입을 열어 그 마음이 낸 결론을 뱉어내려고 하는 순간, 오이카와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카게야마 토비오, 네 주제를 알아야지.”



   순간적으로 오이카와에게서 느껴지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에 카게야마는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방금의 오이카와는 누가 뭐래도 틀림없는 제왕이었고, 정복자였고, 지배자였다. 그와 저의 차이가 순간 너무나도 깊고 넓어보여, 카게야마는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두 잊고 말았다. 순식간에 오이카와의 얼굴에는 예의 그 가볍고 해사한 미소가 띄워졌지만, 그 짧은 순간에 압도당해버린 카게야마의 눈에는 그 미소의 뒤에 아까의 위압감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망국의 왕자도 왕자인가, 토비오?”



   슬금슬금 제게 다가와 또다시 제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을 던지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뒤로 슬슬 물러났다.



   “나는, 그냥 내 장난감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