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키카게] 안녕
*카게른 전력 60분 41회차 주제 ‘안녕' 참여했습니다.
*카게야마 부상요소 있습니다.
따르르릉,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소리에 츠키시마는 눈을 떴다. 찌뿌등한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고, 손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키다 문득 제 옆자리에 누워 잠들었던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입을 살짝 벌리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여, 괜히 손가락으로 볼을 한번 쿡 찔렀다. 잠결에 고개를 슬쩍 돌리는 카게야마를 보며, 츠키시마는 피식,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제 사랑스러운 이를 바라보던 츠키시마는, 이제 슬슬 그를 깨워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에 걸린 커튼을 걷어내자 햇빛이 차르르, 침대 위로 내려들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밝은 빛에 놀랐는지, 카게야마는 잠결에 눈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칭얼대었다. 으응, 눈부셔어.......츠키시마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고는 검은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고 헝클었다. 장난스런 손길에 기분이 좋았는지, 카게야마가 보기 드물게 애교를 부리듯 츠키시마의 손에 제 머리를 부볐다. 이렇게 먼저 나서서 치대는 걸 보면 잠이 덜 깬게 분명하다 생각하며,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동그란 정수리를 한 두 번 더 쓰다듬고는 손을 뗐다.
“일어나야지, 카게야마.”
가볍게 제 어깨를 흔드는 츠키시마의 손길에 카게야마는 작게 5분만 더어-, 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5분은 무슨, 조금만 더 자겠다는 걸 내버려 두었다가 한 시간도 넘게 실랑이를 했던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에, 츠키시마는 안 돼, 하고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힐끗 바라본 시계는 여덟시 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 혼자 가만히 생각한 츠키시마는 이내 다시 카게야마를 깨우는 데에 집중했다. 어제보다 늦었으니까 빨리 일어나, 하는 츠키시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서서히 눈을 떴다.
동그랗게 커지는 눈동자가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이 조금 서글펐지만, 츠키시마는 애써 멀쩡한 척 인사를 건넸다.
“안녕, 카게야마. 만나서 반가워.”
오늘은, 카게야마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던 사고가 일어난 지 정확히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츠키카게] 안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로 도쿄의 대학에 온 츠키시마와 배구로 도쿄의 대학에 온 카게야마가 동거를 시작한 것은 1학년때의 두 사람을 생각하면 의외일지 모르지만, 그 이후의 두 사람을 생각해 보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늘상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며 첫 1년을 보내고, 그러다 저들도 모르게 조금씩 호감을 키워나가며 또 1년을 보내고, 뻗어나가던 마음이 마침내 맞닿아 서로의 곁에서 다시 1년을 보냈다. 마냥 달큰하고 예쁜 연애를 할 성격들은 아니었기에 누가 봐도 연인, 이라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만큼은 알고 있었다. 제 애정이 상대의 마음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는 것을.
하지만 연애라는 것이, 관계라는 것이 늘 그렇듯, 두 사람도 늘상 사이좋지만은 못했다. 사소한 것 하나로도 제 고집을 굽히지 못해 부딪히곤 했지만, 그래도 몇 년간의 동행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끌어안는 방법을 익혀나갔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도, 서로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노력해 볼 만 했으니까. 자존심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두 사람이, 상대를 위해 저를 내려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흐뭇한 일이었다. 츠키시마랑 카게야마는, 정말 서로를 좋아하나봐. 언젠가 들었던 말을 생각하면 가슴께가 간지러워졌다.
그래, 그 날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다가 너를 잃을 뻔할 줄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 텐데. 아니, 그걸 몰랐어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츠키시마는 입술을 깨물며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직도 종종 악몽처럼 제 주위를 맴도는 그 날의 기억을 붙잡으면 죄책감이 끈적하게 심장을 적셔 내리는 듯 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후회의 쓴 맛에 혀가 절로 텁텁해졌다. 먹먹한 가슴께를 한 손으로 그러쥐었다가 놓았다.
시작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카게야마와 크게 싸웠고, 결국 카게야마는 다시는 츠키시마를 보고 싶지 않다고 쏘아붙이고는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그 때 붙잡았어야 했는데, 사과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노려보기만 했다. 세게 닫힌 현관문 소리가 잠잠해지고, 집 안에 적막이 내려앉자, 그제서야 사과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카게야마를 잡으러 따라 나가겠다는 마음은 먹지 못했다. 새벽쯤엔 들어오겠지, 그때까지 기다려 보자. 안일하게 먹은 마음이, 절망의 씨앗이 될 줄이야.
교통사고였다. 음주운전을 하던 트럭에 치였다고 했다. 상태가 심각합니다. 보호자분, 당장 수술을, 동의 서명, 수혈, 의식불명, 다리, 다리, 다리, 운동은, 그만두어야.......새벽 두 시에 병원에 불려가 몇 시간 동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들리는 모든 말을 언어가 아닌 소음으로 인식해버리던 뇌가, 마지막 두 마디에서 멈추었다. 운동을, 그만둬야 한다구요. 츠키시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배구를 하지 못한다구요. 그렇게 사랑하는 배구를, 그만두어야 한다구요.
무너져야 하는 것은 카게야마의 세상인데, 왜 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까.
카게야마는 그 후로도 몇 달을 의식불명 상태로 있었다.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가족들과 함께 병실 머리맡을 지키며, 제발 깨어나기만 하게 해 달라고, 믿지도 않던 신에게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병문안을 오는 고교 시절의 부원들과 동창들은, 츠키시마와 카게야마의 관계를 알든 모르든,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듯한 츠키시마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츠키시마 케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냐는 듯이, 저렇게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얼굴도 할 수 있었냐는 듯이.
그리고 카게야마가 깨어나던 날,
“...누구, 세요?”
츠키시마의 세상은 완전히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카게야마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은 오직 츠키시마 뿐이었다. 최근 몇 년간의 기억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카게야마는 오직 츠키시마만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것 뿐이었다면 나았을텐데. 하루의 기억을 열심히 쌓아내어도, 결국 다음날 아침이 되면 카게야마의 세상에서 츠키시마는 다시 사라졌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가 저 때문에 배구를 잃은 것에 대해 벌을 받게 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츠키시마는 매일 밤 혼자서 눈물을 쏟았다.
배구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카게야마에게는 분명히 충격적인 사실이었을 텐데, 카게야마의 반응은 예상 외로 고요했다. 배구 선수를 하는 건 어렵습니다, 취미로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말을 줄이는 의사에게 카게야마는 꽤나 덤덤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조용히 말하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지켜보며, 츠키시마는 오히려 더 절망의 바다에 빠져버리는 것 같았다. 조금 회복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받는 재활 훈련에도 열심인 것을 보며, 츠키시마는 이유 모를 불안을 느꼈다. 폭풍전야가 꼭 이런 느낌일까, 싶었지만, 섣부르게 카게야마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지금의 저는, 카게야마에게는 온전한 타인이었기에.
그리고 그 불안은 허투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츠키시마가 간신히 붙잡았으니까.
옥상 난간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카게야마를 보며, 츠키시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친듯이 달려가 카게야마를 끌어내리고 품 안에 가두었다. 힘 없이 바둥거리며, 깨어나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카게야마를 안은 채로, 츠키시마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아내었다. 이런 짓이나 하려고 그렇게 재활에 매달렸던 것인지, 차라리 그 괴로움을 토해내며 무너지든지, 왜 이렇게 바보같은 선택을 하려고 했는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츠키시마는 비릿한 혈향이 맴돌 만큼 세게 제 입술을 물기만 했다.
카게야마가 퇴원할 때 즈음에,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와 계속 함께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누군가 옆에서 카게야마를 늘상 붙잡아주지 않으면, 또 언제 허튼 짓을 할 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애는, 너를......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카게야마의 어머니에게, 츠키시마는 괜찮다는 듯이 애써 웃어 보였다. 제 가장 소중한 친구인걸요, 저를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아무리 다리가 온전치 못하더라도, 언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불안정한 20대 청년을 그 부모가 보호하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저는 재택 근무를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고, 열심히 카게야마의 부모님을 설득한 츠키시마는, 그렇게 지난 3년 가량을 저를 잊은 연인과 함께 살았다.
“저기, 수건......”
욕실 문이 달칵, 열리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하고 나오는 카게야마의 인기척에 츠키시마는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수건 개어놓는 걸 깜빡했네, 혀를 츳츳 차며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츠키시마는 빨래걸이에 걸린 수건을 하나 집어들고는 카게야마에게 다가가 머리에 얹어 주었다. 살짝 놀란 듯 저를 올려다보는 카게야마의 모습이 제게 머리를 말려 달라고 하던 과거의 모습과 잠시 겹쳐 보여 마음이 먹먹해졌지만, 애써 몸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카게야마가 저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식탁 위에 미리 요리해놓은 토스트와 반숙 계란 프라이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카게야마의 표정이 슬쩍 밝아졌다. 의자를 살짝 빼 주니 또 저를 슬쩍 올려다보고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는 모습이 어느새 꽤나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에 또 조금 가슴이 아팠다. 카게야마의 맞은 편에 앉아 포크를 집어 들고는 아침 식사를 시작한 츠키시마를 잠시 가만히 쳐다보던 카게야마도 이내 입을 열어 계란 프라이를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식사하던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깬 것은 카게야마였다.
“츠키시마 씨, 라고 했죠...?”
“편하게 불러. 우리 친구라니까.”
“으응...츠키시마.”
어색하다는 듯이 포크를 쥐지 않은 쪽의 손을 꼼질거리던 카게야마가, 고심 끝에 내뱉었다.
“내가 츠키시마만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지, 그렇지?”
“응, 뭐. 아쉽게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며 애써 제 앞의 토스트로 시선을 돌리는 츠키시마에게 카게야마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하필 너일까? 다른 애들은 다 기억나는데. 히나타라든지, 야마구치라든지.......”
“그러게.”
“음, 내가 널 잊고 싶었던 건 아니겠고......”
아니, 잊고 싶었을지도 몰라. 잊고 싶어서 잊은 것일지도 몰라.
“뭔가, 네가 기억나지는 않는데......모르겠다. 기분이 이상하네. 좀, 답답해.”
카게야마가 꼼질거리던 손을 제 명치께에 얹고 중얼거렸다.
“여기가, 꽉 막힌 것 같아. 뭔가 굉장히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우리 많이 친했나봐, 아닌가?”
아릿하게 저며오는 심장에, 츠키시마는 포크를 쥐지 않은 손을 식탁 밑으로 내리고 꾸욱,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팠지만, 제 마음만큼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았다.
“네가 기억나지 않아서, 나도 좀 아쉽다. 미안해.”
츠키시마는 애꿎은 토스트 접시를 내려다보던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눈물이 고일 것 만 같았다. 미안해해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야,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아야 하는 것은 나라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츠키시마는 결국,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안녕, 카게야마. 만나서 반가워.”
“...응?”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츠키시마는 애써 고개를 들고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제게도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일 이렇게 인사해주잖아. 매일 새로 만나고, 새로 친구가 되고 있잖아.”
식탁 밑에서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뻗어 카게야마가 가슴께에 얹었던 손에 대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네게 매일 안녕, 하고 인사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너는 평생 몰라도 괜찮아. 내가 받는 벌을, 너는 영원히 모르고 살아주렴.
반짝이는 햇살 아래서 가만히 삼키는 생각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