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게] 조각
[히카게] 조각
“나는 네가 미워.”
그렇게 말하는 네 눈가에 아롱지는 눈물을 보며 나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려 해도 입이 채 떨어지지 않는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도 안되는 말을 그만두었는데, 왜 기쁘지 않을까. 왜 안심되지 않는 걸까. 왜, 왜, 왜. 삼키는 숨마다 끈적히 들러붙어 기도를 막는다. 답답한 가슴께를 내리치면, 그러면 다시 숨통이 트일까. 알 수 없다.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혀 끝을 맴도는 말을 뱉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해버릴 것 같아 주먹을 꾸욱 눌러쥔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아릿할 만큼 세게 힘을 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몇 번씩이나, 몇 번 씩이나 그렇게 말했는데, 그걸, 그렇게 착각이라고 말하는 네가 미워. 누군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렇게 부정하고 부정하는, 그런 네가 미워. 싫어. 짜증나.”
떨리는 목소리로 네가 중얼인다. 말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분명 네가 나를 밉다고, 싫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퍼붓던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그 헛소리들을 다 거두어버릴 것 마냥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왜, 왜, 왜. 여전히 꽉 쥐어진 주먹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만, 그만해.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마. 그만, 제발 그만… 방향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뿌리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온 몸을 감싸쥔다. 감정의 손아귀에 꼼짝없이 붙잡혀, 영원히 뱉지 못할 것 같았던 마음 속 깊은 곳의 진실이 억지로 뱉어내질 것만 같다. 어느새 네게 고정되어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눈동자가 태양을 보는 것 마냥 시리다. 뜨겁다, 뜨겁다, 뜨겁다.
“그런데 있잖아, 제일 싫은 게 뭔지 알아, 카게야마?”
네 표정이 서글프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서는, 입은 억지로 웃어 보인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보자 별안간 약한 현기증이 인다. 눈 앞이 조금 뿌옇게 흐려지는 것도 같다. 꿈을 꾸는 것 같다, 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네 주황빛 머리칼을 흔든다. 그 주황빛 파도에, 햇살이 부딪혀 찬란히 부서진다. 산산히 조각나는 그 빛줄기들에 나는 결국 눈을 감아버린다. 까만 암흑이 덮친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하면 이 흔들림도 끝이 날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이 감정의 소용돌이도 잦아들까. 억누른 감정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말들이 눈가에 맺혀 주르륵 흐른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서있던 너와 나의 사이를, 눈물에 젖은 진심이 무겁게 채운다.
“네가 밉다고 말하면서도,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내가, 제일, 싫어.”
뚝, 뚝, 끊어지는 말끝에 피가 차갑게 식는다. 네 그 지독한 거짓말이 목을 조른다. 사랑한다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웃기지도 않는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렇게 평소처럼 되받아쳐줘야 하는데, 입술이 꾹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뱃속에 무거운 유리 조각이 박혀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인다. 통증은 천천히, 가슴을 타고 올라와 목구멍에 상처를 내고, 혀끝에 올라 달라붙는다. 지금, 지금 말하지 못하면 영원히 말하지 못할 것 같은 진심이 머리를 흔든다. 타는 듯한 열기가 어지럽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간신히 다시 붙잡고 눈을 뜬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네 두 눈동자가 원망스럽다. 나를, 지독하게, 흔드는, 네가.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입을 애써 연다.
“거짓말은, 그만해.”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갈색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며 걸음을 뗸다. 네 옆을 스치고,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결국 토하지 못한 진심은, 마음 한 구석에 고여, 맴돌다가, 썩고, 버려지고, 결국에는 말라붙고, 그렇게, 그렇게…….
축축한 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햇살은 여전히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