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HQ

[오이카게] 나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톨쟌 2016. 7. 20. 00:11





*오이카와 생일 기념 오이카게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생일 축하해 토오루! 생일인데 이런 글 써서 미안해...

*사망 소재/자해 언급/살인 묘사 주의



오이카와 토오루x카게야마 토비오

나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0.

너는 죽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었다.

 

 

1.

그 새벽의 퇴근길은 비와 고양이와 너로 요약된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의 소음에 기분이 나빠져 왼쪽 어깨의 가방을 고쳐 메던 것을 기억한다. 어깨가 젖는 축축한 느낌에 가방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하나하나 되새겨보다 미간을 찌푸리던 것도. 어느 가게 지붕 아래에서는 오렌지색 얼룩무늬 고양이가 비를 피하며 노란 눈을 번득였고 나는 괜스레 짜증을 부리며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를 멀리 차내었다. 파드득 놀라며 쏜살같이 사라지는 누런 꼬리를 보며 나는 또 툴툴거렸고 우산을 든 손은 점점 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집 앞에 다다라 지친 한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우산을 채 접지 못했다. 흠뻑 젖은 공기를 가르고 현관문 앞에 앉아 있는 너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다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은 네가 내 문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붕 밑으로 들어와 우산을 접고는 그 끝으로 네 발치를 툭툭 쳤다. 거기, 좀 비켜 줄래요. 물음도 무엇도 아닌 이상한 것을 던져내고는 잠자코 기다리는데, 너는 잠이라도 든 듯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곤란하게 됐네, 이거. 나는 장우산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어이, 자요?

 

삐딱하게 던지는 말에 네 머리통이 좌우로 움찔거렸다. 아니라는 거죠, 제대로 된 대답도 오지 않는 것을 혼잣말마냥 조잘이는 꼴이 우스웠다. 또 우산으로 네 발께를 톡톡 두드렸다. 뭐 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갈 곳 없어요? 이제 슬슬 겁마저 나려고 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계속 떠들었고 너는 어깨를 몇 번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서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앳된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네게 손을 뻗었다. 도중에 머뭇거리고 말아서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버렸지만 어쨌든간에 나는 손을 뻗었고 너는 망설이다 그것을 붙잡았다. 맞잡은 손이 비에 젖어 조금 찼다.

 

기묘한 동거의 시작이었다.

 

 

2.

처음부터 내가 너와 살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너를 적당한 고아원에 보낼 생각이었고 너는 네가 고아가 아니라며 싫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꾸 때려서 도망쳤어요. 담담하게 말하고는 내가 건넨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던 처음의 네가 눈 앞에 아른거리며 겹쳤다. 고아원에 가면 내가 그 사람 아들이라는 게 밝혀지겠고 그럼 다시 돌아가서 맞을 거예요. 노란 수건이 펄럭일 때마다 얼굴이 드러났다 가려졌다 했고 자잘한 물방울이 함께 튀었다. 빗물은 미지근했고 나는 너를 그냥 가만히 두기로 했다. 딱히 네가 불쌍했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네가 그럭저럭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너는 동거를 시작한 지 사흘 째 되던 날 세면대 거울을 깨서는 그 조각으로 손목을 그었고 나는 엉망이 된 화장실 바닥을 청소하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차라리 칼을 찾아달라고 하지 그랬니, 유리 값을 알아보다가 나는 한숨처럼 그렇게 뱉었고 너는 미안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 번에는 그렇게 할게요. 그래서 칼은 어디에 있어요? 태연하게 묻는 얼굴은 순진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고 영악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커터칼을 던져주었다. 소독약은 없어요? 묻는 말에는 허, 기가 찬 웃음을 짧게 웃었다. 돈 줄 테니까 약국 가서 사와. 지갑을 뒤져 꽤 큰 액수의 지폐를 꺼내 준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네가 거스름돈이 너무 많다며 입을 삐죽거리고 내 앞에 다시 털썩 주저 앉았을 때에는 제법 놀란 마음이었다.

 

죽고 싶어서 그래? 능숙하게 소독약을 바르는 너를 보며 나는 가만히 물었다. 너는 따갑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붉은 약을 닦아내고는 연고를 덧바르며 말했다. 죽고 싶긴 한데, 그래서 긋는 건 아니고요. 희뿌옇게 불투명한 연고를 약지로 얇게 펴바르자 길고 붉은 상처들이 약을 입고 반짝였다. 이거라도 안 하면, 도저히 살아있는 기분이 나지를 않거든요. 끈적끈적해진 약지를 치켜들고 연고 뚜껑을 닫으며 네가 말했다. 나는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눈동자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서 나는 두려워졌고 동시에 즐거워졌다.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깜박였다. 깜박, 깜박.

 

 

3.

내가 네게 연민 비슷한 것을 느낀 것은 여름의 초입 즈음이었다.

 

내 안은 온통 부서지고 조각나서 남은 것이 없어요. 까만 머리칼로 덮인 머리통이 왼쪽으로 슬쩍 기울어지다 투웅, 느릿느릿 제자리로 튕겨올랐다. 숨을 내쉬듯 토하는 말소리를 듣기 위해 침묵으로 목을 졸랐다. 정적이 휘이이 하고 나는 숨소리를 삼키려 덤비었다. 나는요, 반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건조한 속삭임에서는 공허한 냄새가 났다. 파랗고 검은 눈동자가 녹슨 쇠구슬마냥 삐걱이며 간신히 굴렀다. 나는 문득 불안해져 네게 손을 뻗었고 너는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그러쥐었다.

 

따뜻하네요.

 

손이, 따뜻해요. 어쩌면 당연할 사실을 너는 신기하다는 듯 뱉었고 나는 문득 그것이 못내 애처로웠다. 네 손을 바투 붙잡고는 네 눈동자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깊은 심해 같기도, 먼 우주 같기도 한 그 진한 푸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너를 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 들어오는 온기는 가까우면서도 멀어서 나는 겁이 났고 네가 사라지는 동시에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등에 얹었다. 도닥이는 손길에 네가 얼굴을 내 어깨에 묻었다. 죽고 싶니? 묻자 너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죽고 싶어? 또 한 번,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너를 안은 팔에 힘을 빼었다. 너는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어.

 

중얼이는 말에 너는 울음 섞인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깨가 조금 젖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빗물처럼 눈물도 미지근했다. 나는 다시 손에 힘을 더해 네 등을 두드렸다. 정말 죽고 싶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묻자 너는 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왜 그렇게 죽고 싶어 하니,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너도 딱히 어떤 대답을 던지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너를 한참동안 안고 있었고 너는 그렇게 한참동안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아무것도 몰랐고 그보다 더 오래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7.

흰 꽃무더기에 묻힌 너는 아름다웠고 나는 너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몸을 움찔했다가 네가 죽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어쩜 이렇게 잠을 자는 것 같지. 나는 꽃에 싸여 관 안에 누워있는 너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뻗어 입술을 매만졌다. 파랗게 질려가는 입술은 퍼석거렸고 나는 네게 입술 보호제 하나도 챙겨주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거라도 빌려주는 건데. 가만히 네 입술을 계속 매만지다가 느릿하게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숙여 그 위에 내 입술을 대었다. 건조한 맛이 났다. 나는 혀를 내어 네 입술을 몇 번 축이고는 떨어졌다. 푸른 입술이 내 타액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자 나는 슬퍼졌고 그래서 눈물을 흘렸다.

 

너는 왜 죽어서 이렇게 아름답고 나는 왜 살아서 이렇게 슬퍼할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무도 오지 않는 우리 둘만의 장례식에서 나는 조금 아팠으며 잠깐 서러웠다. 네가 죽는 것을 슬퍼하는 것은 나 뿐이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네가 하던 것처럼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소원을 이뤘네, 기쁘지?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너일 수도 있었고 나일 수도 있었고 그 누구도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바로 하고는 다시 너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걸 보면 나는 너를 정말로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 기억났다. 나는 그 사실이 안타까워 또 눈물을 흘렸고 그 후로도 아주 오래 슬펐으며 그러나 동시에 또 아주 오래 기뻤다. 네 비석에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장례식이 끝난 후에도 너를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굳이 비석도 흔적도 없어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너였고 너의 죽음이었고 너의 장례식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나는 너를 오래 기억하기로 작정했고 그것을 보여 줄 무언가를 원했다. 나는 팔을 뻗어 가슴 위에 모아진 네 두 손 위에 내 손을 얹고 네 귀에 입술을 대었다.

 

기억할게.

 

맹세인지 빈말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아직은.

 

 

6.

너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네가 늘상 하던 것처럼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했다. 죽여달라면서. 너는 그제야 입꼬리를 살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너의 눈에서 또다시 무언가 일렁이는 환상을 보았고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목격자도 생존자도 없을 이 살인에 나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의식처럼 흰 장갑을 손에 끼었고 너는 그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입을 열었다. 그냥, 나는 생명이 꺼지는 그 순간을 느끼는 걸 좋아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내게 너는 와르르 웃으며 말했다. 당신, 정말 미쳤군요.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네게 다가갔다. 너는 웃는 표정 그대로 눈을 꾸욱 감았다.

 

왜 오늘이에요?

 

묻는 말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다. 오히려 기쁨 비슷한 것으로 뒤범벅이 된 말투에 나는 마주 웃어주며 말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거든. 그러자 너는 불투명한 폭소를 토한다. , 그런 거였어요? 이제야 다 알겠다는 듯 말하는 네게 나는 한쪽 입꼬리만을 비틀비틀 올리며 말했다. 너도 되게 미쳤구나. 너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가볍게 가로저었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이제 몇 번 듣지 못할 공허한 숨소리가 울렸고 너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다만 죽고 싶을 뿐이에요. 어디선가 이상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나를 죽여주면 고마울 뿐이죠. 말들이 폭풍처럼 뒤섞여 귓가에 내려앉았다. 당신이 나를 죽여준다면, 그건 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기어이 네 목에 두 손을 얹는다.

 

손 끝에서 맥이 뛰었다. 나는 더욱 힘을 주었다. 너의 얼굴조차 보지 않은 채 오직 네 목을 붙잡은 손에만 집중했다. , , , . 곧 멈출 심장이 제 존재를 미친듯이 외쳤고 나는 손끝 마다 환희를 불어넣었다. 아아, 이 느낌, 이 기분이야.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네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좋아,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나는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생을 꺼트리는 것이 이렇게 잔인한 동시에 행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나는 잠시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정말, 정말 아주 잠시였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흥분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네 몸의 떨림이 잦아든 후에도 한참동안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손을 뗀 후에 나는 너를 침대에 올려놓았고 네가 예쁘게 눈을 감고 있는 것을 알았다. 착하기도 하지. 네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런 너를 왜 그렇게 학대했을까, 너희 아버지라는 사람은. 손끝으로 네 목에 난 손자국을 훑었다. 느껴지는 생명의 흔적은 없었고 나는 또 너무 기뻐져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역시 사람은 죽은 후에 두 번째로 아름다워. 작게 중얼거리며 네 볼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첫 번째로 아름다운 건 죽는 순간이고. 손 끝에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는, 맥이 꺼지던 순간의 촉감을 기억하려 애쓰다가 기쁘게 웃었다. 나는 너를 쓰다듬던 손을 내 입술에 대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오이카와상. 노래를 부르듯 생일을 자축하며 나는 손을 다시 내려 네 입술에 대고 송사를 읊었다. 잘 가, 잘 가요.

 

너를 죽인 오늘은 나의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생일로 남겠지요.

 

 

5.

,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요. 책상에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은 너의 다리가 흔들거렸다. 시계추처럼 오가는 마른 종아리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덜컹, 덜컹, 소리가 났다. 걱정 마세요, 신고 안 하니까. 그제야 덜컹이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는 너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너도 나를 되돌아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네 눈동자 너머에서 무언가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두려움도 당황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반갑기도 했다. 너는 기대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을 위한 기대인지 알고 있었다.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한 쪽만 올라갔다.

 

날 죽여주면 안돼요?

안돼.

 

역시나 예상한 말을 던지는 너에게 나는 준비하던 거절을 빠르게 내었다. 왜요? 다시 텅 빈 눈동자로 묻는 너에게 나는 반문했다. 나야말로 왜? 내가 널 죽여서 이득 볼게 뭐가 있지? 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몇 번 뻐끔대고 닫았다. 한참을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리며 망설이던 너는 결국 참지 못하고 또 물었다. 언제는 무슨 이득이 있어서 사람 죽였어요? 당돌한 질문이었고 나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긴 한데, 너를 그렇게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말이야. 장난처럼 던지는 말에 너는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은 눈을 하고는 내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상하게 즐거워져서 또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죽고 싶어요.

 

기묘하게 무게가 실린 말에 나는 둥글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내렸다. ? 묻는 말에 너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는 버릇을 다시 내어 보였다. 알잖아요. 이번에는 네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웃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가슴이 쿵 내려앉아 모른 체 시치미를 떼었다. 모르겠는데, 나는 뭐든지 아는 척척박사님이 아니랍니다? 너는 내가 모른 척을 하는 것을 알아차렸고 고개를 바로 세우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나는 그 모습에 푸스스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어 네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네가 알지 못하는 속내를 혼자 가만히 되새겼다. 7월의 햇살은 무르익었고 나는 에어컨의 온도를 내렸다.

 

여름이었다.

 

 

4.

나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뜬금없이 던지는 말에 나는 조금 놀라 너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네 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 정신없이 오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어쩌면 환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네가 아니기에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네게 비딱하게 웃어주었다. 오이카와상은 사랑 같은 거 모른답니다. 짓궂게 내는 목소리에 너는 입술을 주욱 빼며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모르는데요. 삐친 것인지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것이 제법 귀엽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웃고 말았다. 사랑을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내게 묻는 것처럼 네게 묻자 너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잘은 모르겠는데사랑이란게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바보같네.

 

딱 잘라 말하는 내게 너는 또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꼭 말을 그렇게 해야 해요? 까만 머리카락이 고르게 난 정수리에 손을 얹고는 쓱쓱 쓰다듬었다. 그럼 이렇게 말해 볼까. 둥그런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어리네. 잔상처럼 남은 말의 메아리에 너는 몸을 떨었고 나는 입술을 멀리 떨어트렸다. 너는 바보같지만 그건 네가 어리기 때문이겠지.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나는 다시 네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네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스윽, 스윽. 머리카락이 맨살에 스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다른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착각하는 거야, 어려서 그래. 작게 목소리를 내며 네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잠잠히 그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찾아왔다.

 

내가 너를 사랑할 일은, 어차피 없다고.

 

참으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