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카게테루] 늦여름의 소년들
후타쿠치 켄지x카게야마 토비오x테루시마 유우지
늦여름의 소년들
그러니까, 애초에 후타쿠치 켄지의 인생에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인간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멍하니 창 밖을 보던 후타쿠치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창 틈으로 새는 바람에 실려 흩어진다. 가볍게 고개를 저어 상념의 잔재를 떨구어내는 소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덧그려진다. 새카만 앞머리가 찰랑이는 아래로 푸르게 빛나는 홍채가 반짝이는 모습이 눈 앞에 절로 피어오른다. 얇게 뻗은 코를 지나 눈을 더 아래로 두면, 버릇처럼 주욱 튀어나온 분홍빛 입술이 있다. 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니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낸 중얼거림에 앞 뒤 자리 남학생들이 움찔한다. 니로 새끼, 여자 있냐? 여름의 열기에 불타는 마음들 한 가운데로 후타쿠치의 발언이 기름을 붓는다. 씨발, 지가 뭔데 애인을 만들어? 불퉁한 목소리가 앞서면 뒤따르는 것은, 그래도 저 새끼 얼굴 반반한 건 다들 알아주지 않냐, 하는 모종의 옹호 발언이다. 그러나 수군거리는 목소리들 사이로 금세 흰 분필이 날아들어 소란을 깬다. 거기, 입 안 다무나? 불 같은 영어 선생의 호통에 쥐 죽은 듯 입을 다물다가도, 결국에는 꿈꾸듯 환상에 젖은 후타쿠치의 얼굴로 흘금흘금 시선을 둔다. 재수 없긴, 툴툴거리는 소리들이 들리지도 않는지 후타쿠치의 얼굴은 노상 밝기만 하다.
그 작은 소음들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는 듯, 소년은 평온히 눈을 감고 본격적으로 상상에 접어든다. 어디까지 했더라, 허공에 손가락을 짚어 가며 기억을 더듬던 그는 어느 지점에서 뚝 손짓을 멈춘다. 그래, 그 예쁜 입술을 보면서, 턱을 붙잡고 말하는 거지. 목소리 쫙 깔고는, 눈 감아, 카게야마-하고. 크으. 멋지다, 켄지. 백일몽에 젖은 웃음은 싱글싱글 입꼬리에 걸려 내려올 줄을 모른다. 즐거운 상상은 조금 애가 탈 만큼만 천천히 나아간다. 제가 시키는 대로 살포시 눈을 감은 머릿속 카게야마의 얼굴이 서서히, 서서히 가까워지고, 마침내 제 입술에 말캉한 감촉이 와 닿을 때쯤에…
“어이, 여기서 뭐 해?”
형체를 갖지 않는 쾌활한 목소리에 후타쿠치는 가볍게 몸을 떨며 생각에서 빠져나온다. 아, 씨발. 눈을 팩 뜨고 짜증에 찬 욕설을 뱉는 것에 주변 녀석들이 또 한 번 움찔한다. 흘깃거리며 제 눈치를 살피는 시선들에 그는 눈을 부라린다. 뭘 봐, 사나운 입 모양을 해 보이자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수업에 신경을 쏟는 척 하지만, 실상은 다들 관심을 끄지 못하고 있다. 후타쿠치는 입술을 깨물다가, 팔을 들어 손에 얼굴을 묻고 머리카락을 쥔다. 그 새끼는 왜 상상 속에서도 방해하고 지랄이야. 꿈질거리는 손에는 갈색 머리칼을 거의 쥐어뜯어 버릴 만치 힘이 들어간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장난기 가득한 얼굴, 그리고 혀에 박은 은색 피어싱이 빠르게 뇌리를 스친다. 그것마저 기분이 나빠 후타쿠치는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존나 기분 잡치게. 후타쿠치는 제가 거의 입을 맞출 뻔 했던 입술을 가로막고 선 얼굴에 협박 비스무리한 것을 해 본다. 거기서 비켜라. 아니, 내 머릿속에서 꺼져. 그러나 악의 없어 보이는 그 특유의 웃음은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후타쿠치는 고개를 들어 괜히 칠판 위의 꼬불거리는 글씨들을 바라본다. 씨발, 더 머리 아프네. 그는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푸욱 내쉰다.
그래, 애초에 내 인생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던 인간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라, 테루시만가 뭔가, 그 재수 없는 노랑 머리지.
뿌드득, 거칠게 이를 가는 소리에 졸고 있던 옆 자리 짝이 파드득 놀라며 눈을 뜬다. 거기 너, 뭐 하는 거야? 졸지에 눈에 띄여버린 녀석은 노란 분필에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곤 울상이 되어서 입을 연다. 저,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억울하단 투의 웅얼거림은 마침 치는 종소리에 가로막혀 선생의 귓가까지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 수업은 이만 끝이다. 다들 곧 3학년이니 수업에 좀 집중을 해 봐라, 집중을! 끝을 알리는 인사에 잔소리를 덧붙이는 것에도 다들 네에, 형식적인 대답만을 웅성웅성 내어 놓을 뿐이다. 으이구, 답 없는 새끼들. 혼잣말처럼 남기는 마지막 푸념이 수업이 끝난 것에 들뜬 남고생들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 후타쿠치의 경우에는 분노하는 마음에 채 듣지 못하는 듯 했지만. 요란한 쉬는 시간의 소란 사이로 후타쿠치는 다짐하듯 혼자 주먹을 꾸욱 쥔다. 내가, 오늘은 그 새끼랑 담판을 짓는다, 정말.
그러니까, 나는 정말 담판을 지으려고 온 거다. 그렇게 몇 번이고 새기고 또 새겼건만, ‘카라스노 고교’라는 글자가 박힌 교문 앞에 선 후타쿠치는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뭔 사춘기 중학생마냥 이렇게 떨고 난리야. 제가 생각해도 어색한 제 모습에 후타쿠치는 문득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으, 간지럽게시리. 남고생에게는 어색하기 그지 없는 폭신폭신, 뭉게구름 같은 감정이 가슴을 가득 메운다. 몽글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그렇게 한참을 교문 앞에서 서성이던 그를 익숙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붙잡는다. 어, 후타쿠치 씨? 그토록 마주치길 고대하던 목소리에 후타쿠치는 순간 얼어붙는다. 씨발, 어떻게 목소리도 예쁘냐. 여유로운 척 생각을 잇지만 사실 심장은 벌써 제 박자를 놓친 지 오래다. 침착하게, 멋지게, 인사해 주는 거야. 그래, 잘 할 수 있지?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말을 걸고는 돌아서서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려는데,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온다.
“…씨발.”
“순진한 어린애 앞에서 욕은 안 되지.”
웃음기가 잔뜩 배인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좋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오니, 이쯤 되면 반사 작용이 아닌가 싶다. 어째 얼굴만 봐도 씨발이 튀어나오냐, 저 면상이 무슨 발아하는 씨도 아니고. 후타쿠치는 반가운 얼굴과 전혀 반갑지 못한 얼굴을 동시에 눈 앞에 두고는 어찌 할 줄 몰라 미간만 찌푸린다. 저 새끼는 어째 맨날 저렇게 여유롭고 지랄이야. 잔뜩 구겨진 얼굴 뒤로 짜증이 흐른다. 그런 후타쿠치의 마음을 훤히 안다는 듯 테루시마는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는다. 안녕, 니로 군? 이제 와서 인사가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어쨌든 인사를 받았으니 후타쿠치는 답례를 선사한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어, 그렇게 많이들 부르지 않나?”
“당신한테 그렇게 불리긴 싫다고, 씨발.”
잔뜩 성이 난 소리로 하는 말에도 테루시마는 여전히 여유가 넘친다. 후타쿠치는 그와 제 신경전이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순진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카게야마가 신기할 정도로 답답한 동시에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눈치 없는 것도 귀엽고 그러냐, 왜. 까만 앞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 위로 아까의 상상이 겹친다. 그러나 테루시마에게로 재차 신경을 돌린 후타쿠치는 저벅저벅 걸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선다. 흙이 실린 바람이 걸음마다 날려 서부 영화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도 같다. 혀에 박힌 피어싱이 선명히 눈에 들어올 만큼 테루시마에게 가까이 들러붙어서는 매섭게 눈을 뜬 후타쿠치는 노란 머리에 햇빛이 반사되는 것이 영 거슬려 눈살을 찌푸린다. 거, 머리 염색 할 생각 없나, 요란하게. 상황에 맞지 않는 푸념을 반쯤 뱉을 뻔한 그는 혀를 씹을 듯이 입을 꾸욱 다물어 간신히 잇새로 새는 소리를 막아낸다. 진정하자, 진정. 지금 해야 될 말은 그게 아니지. 고개를 틀어 카게야마에게 입 모양이 보이지 않게 한 후타쿠치는 테루시마에게 나직하게 속삭인다.
“시커먼 사내새끼한테 미쳐서 이 지랄 하는 거, 좀 웃기지 않나?”
“지금 혹시 자기 소개 시간이야?”
아, 정곡을 찔렸다. 아주 제대로 찔렸다. 그러게, 멍한 표정으로 무의식중에 대답을 낼 뻔한 후타쿠치는 이내 다시 표정을 다잡는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는 것이 다잡는 것에 포함이 되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는 되받아쳐줄 말을 채 생각지 못해 사납게 욕설을 몇 번 중얼거리다가, 반짝이는 은빛을 보고 간신히 말을 잇는다.
“…뭐 박은 혀로 떠들긴 존나 잘 떠드네.”
“그래? 칭찬으로 들을게.”
어째 한 마디를 지지를 않냐. 후타쿠치는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손을 움찔거린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카게야마 앞에서라면 그 어떤 짓도 섣불리 할 수 없다. 그동안 쌓아온, 겉보기와 다르게 상냥한 공고 선배의 모습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게야마가 무언가 알겠다는 듯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저와 테루시마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후타쿠치는 얼굴을 테루시마의 귓가에 더 바싹 댄다. 감정을 잘근잘근 씹어 삼키기 전 뱉어내는 것마냥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협박 비스무리한 것을 낸다.
“작작 해라, 애 보고 있는 거 안 보여?”
“너야 말로 작작 해야지. 벌써 욕을 몇 번을 했더라?”
정말 한 마디라도 져 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불만을 가득 담은 몸짓은 금방이라도 테루시마의 얼굴을 가격할 것 같은 기세다. 제대로 담판을 짓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그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꾸욱 쥔 주먹이 저도 모르게 날아가려는 순간, 또다시 그를 붙잡는 것은 그가 꿈에 그리고 또 그리던 그 목소리다.
“저기, 자리 피해 드릴까요?”
“어?”
“뭐?”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카게야마에게 후타쿠치와 테루시마의 시선이 집중된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제게로 쏠리는 시선에 당황한 듯 눈을 둥글게 뜨다 이내 쭈뼛쭈뼛 입술을 뗀다. 저, 그게, 두 분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아서… 별 것 아닌 말인데도 귓가를 붉히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두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본다. 그런 둘의 꼴이 적잖이 답답했는지 결국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조금 큰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둘이 너무 답답해서 그러는데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도 모르세요?”
“…뭐라고?”
“엉?”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두 사람을 무시한 채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에요? 카게야마가 아무렇지 않게 낸 목소리에 두 사람은 서로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입을 떡 벌리고는 카게야마에게 시선을 돌린다. 아니야! 아닌데? 거의 동시에 터져나온 부정에 카게야마는 또다시 오리 입을 한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요? 당당하게 말하는 투가 귀엽다는 생각도 잠시, 두 사람은 허탈한 한숨을 내뱉고는 이마에 손을 짚는다. 아아, 하늘이시여, 무심하기도 하시지. 후타쿠치가 먼저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테루시마가 이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땅을 내려본다.
“카게야마, 우리가 자기 꼬시려고 한 거…모르는 거지?”
“씨발, 존나 하나도 몰랐던 거 같은데.”
그토록 서로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이 이 순간만큼은 한 마음이 되어 중얼거린다. 아, 진짜. 쟤는 예쁜 만큼 눈치도 없어? 당장이라도 하늘에 대고 원망의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며, 후타쿠치와 테루시마는 푸욱 한숨만 내쉰다. 영문을 모르는 한 소년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두 소년의 위로, 늦여름의 햇살이 뜨겁게 내리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