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D/HQ

[오이카게] Phobia

톨쟌 2016. 8. 19. 19:55



*월간 오이카게 2호에 참여한 글입니다. 




오이카와 토오루x카게야마 토비오

Phobia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의 이웃은 개를 키웠다. 까슬한 갈색 털로 덮인 마르고 작은 몸과 삐죽하게 튀어 나온 주둥이, 검게 반짝이던 코와 쫑긋거리는 세모난 귀를 가진 놈이었다. 녀석은 왼쪽 뒷다리를 조금 절었는데, 길에서 떠돌던 것을 데려다 키우는 것이라 주인도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무슨 사고를 당한 게 아닐까, 아니면 혹 누가 해코지를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듯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러나 녀석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녀석은 그런 다리를 하고도 졸랑졸랑 이곳저곳을 잘도 돌아다녔고 해질녘이 되면 제 집을 찾아 되돌아오곤 했다. 제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아는 게지, 주인은 그리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잘 짖었지만 사납지는 않았다. 단지 겁이 많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일단 짖고 보았지만 무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러고는 조금 익숙해지면 꼬리를 치며 졸졸 따랐다. 웃기는 놈일세, 하며 허허 웃던 아버지의 앞에서는 몇 번 뱅뱅 제 꼬리를 쫓아 돌다가 주저앉아 귀 뒤를 뒷발로 긁었다. 녀석은 나도 많이 따랐는데,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치면 꼭 반갑게 달려와 아는 체를 했다. 꼬리를 흔들며 뛰는 녀석의 앞에 쪼그리고 앉으면 녀석도 따라 앉았고 나는 손을 뻗어 머리와 등을 쓰다듬고 귀 뒤며 턱 밑을 긁어주었다. 손 끝에서 콩콩, 빠르게 생명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마을은 강가에 있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강이 넘칠 듯 넘실거리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강가에 가지 못하게 했다. 잘못해서 휩쓸리면 큰일 난단다, 어머니의 말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큰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는 도통 알지 못했다. 적어도 열한 살이 되던 해 이전까지는 그랬다. 그 해 여름에 이웃집에서는 개집에 비가 들지 않게 판자를 단단히 대어 놓는 것을 깜박 잊었고, 녀석은 그것이 영 불만이었던지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녀석이 발견된 것은 장마가 그치고 사흘은 지난 다음이었다. 폭우로 거세진 물살에 휘말려 헤엄도 쳐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강둑으로 밀려왔다. 퉁퉁 불은 몸은 생명이 사그라들기 전의 마른 모습과는 처참할 정도로 딴판이었고 나는 어머니가 눈을 가리기 전까지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물이 휩쓸어 갈 수 있는 것들의 무게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어서도 그러했고, 대학을 졸업해 취직까지 한 지금에서도 그러하다. 오랜만에 본가를 방문해 온 가족이 올림픽 수영 경기를 보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울렁이는 속을 참아내기 어려워 과일만 집어먹었다. 푸른 경기장 바닥이 투명하게 비치는 맑은 물 사이로 유영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내게는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았다. 저들은 저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지 알고 있어, 수십 수백 번을 되뇌여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 저기 나왔다, 우리 나라 선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을 때야 나는 TV에 시선을 둘 수 있었고, 붉은 색 국기를 수영모에 단 일본 국가 대표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선수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밑으로 자막이 떴다.

 

카게야마 토비오. 일본 대표.

 

까만 수영모에 올려 놓은 수경을 손으로 잡아 내린 선수, 카게야마 토비오는 이내 까맣게 빛나는 렌즈 아래로 남색 눈동자를 숨기었다.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혀서 그가 하는 모양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남자 자유형 4백 미터. 화면 우측 상단에 뜨는 종목 명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스타트대 위에 자세를 잡은 그를 보던 나는 귓가에 울리는 출발 준비 신호에 주먹을 꾸욱 쥐었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에서는 마치 내가 찬 물에 뛰어든 것 같이 팔뚝에 소름이 주욱 돋았다. , 카게야마 선수, 스타트에서부터 선두를 차지하는데요! 흥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시합을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득해지고, 내 눈에는 오직 그 한 사람만 가득히 들어찼다. 팔을 움직이고, 발을 차 순간에 수영장 저 끝까지 헤엄쳐 가더니, 또 단숨에 벽을 걷어차 뒤로 돌고는 물 속을 누볐다. 마치 처음부터 물 속에 속해 있었다는 듯이 수영을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털어 생각을 밀어냈다. 물은 제게 속하지 않은 것에 적대적으로 구는 버릇이 있다는 생각은 뿌리가 깊었다.

 

금메달, 카게야마 선수, 금메달입니다!”

 

언제 경기가 끝났는지, 화면에는 그가 금메달을 땄다는 문구가 화려한 그래픽과 함께 등장했고, 중계석에서는 기쁜 어조의 외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수경을 벗고는 소년 같은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띄운 그를 오래 쳐다보다가 다시 과일로 시선을 떨구었다. 예쁘게 깎인 사과를 집어 들며 나는 그가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 같이 육지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를 물에 살도록 태어난 사람. 그러나 이내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며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짤각, 도자기와 스테인레스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경기 이후로도 그를 종종 떠올렸지만 그다지 오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올림픽을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그의 생각을 차곡차곡 접어 버리는 생활은 채 한 달도 지속되지 않았다. 올림픽이 끝난 이후로는 그의 생각이 날 만한 일이 더 줄어들었고 나는 서서히 평소의 당연한 일상으로 의식을 옮겨갔다. 더 이상 그가 나의 생각을, 나의 삶을 침범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고.

 

오이카와 씨, 우리 새 홍보 모델 쪽이랑 계약 관련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게 있어서. 오이카와 씨가 좀 만나고 올 수 있을까?”

문제 없습니다. 언제 가면 되나요?”

 

어느 월요일 오후에 느즈막히 던져진 말은 단순한 일거리에 불과했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내었다. 그 대답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였다. 그래서 며칠 후 약속 장소로 걸어 들어오는 묘하게 익숙한 인영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담백하게 인사를 하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는 모습에 나는 기가 차 혼자 몰래 헛웃음을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TV에서 많이 뵈었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를 멍청하게 내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맞잡은 손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손은 잘 쓰지 않는 운동이라 그런가,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하며 손을 놓고는 자리를 권했다.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던 그는 내 손이 뻗어지는 것을 주시하다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어리구나.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리숙하고 서툰 몸짓이 온 몸에 배어있었다. 내가 그의 경기를 보지 못했다면 그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이렇게 어린 소년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물 속을 누비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에이전트가 다른 계약 때문에 바쁘다는 이야기며, 앞으로 있을 아시아 선수권 대회 일정 이야기며, 이것저것 제법 선수다운 이야기도 꺼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았고, 습관처럼 비죽여지는 입술을 스치듯 응시했으며, 수영 이야기를 꺼내자 들뜬 듯 움직이는 손끝을 살폈다. 어리지만 수영에만큼은 열정을 다하는 사람, 그것이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인상이었다.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는 에이전트와 잘 상의해 보라는 말을 두고 일어서려다가, 나는 문득 그를 다시 돌아보았다. 반쯤 일어난 나를 주욱 올려다보는 눈빛이 꽤나 매력적으로 보여서 순간 당황이 스쳤지만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아니,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번호를 물은 후였고,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내 핸드폰에 번호를 입력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아무한테나 번호 알려줘도 돼요? 핸드폰을 돌려받으며 애써 태연한 척 던진 농에 그는 퍽 진지하게 답했다. , 나쁜 분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요. 또다시 나를 응시하는 푸르른 눈동자에서 나는 물을 보았다. 가차없이 휩쓸어 원하는 것을 가져가는 물. 나는 그의 푸른 물살에 휩쓸려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쓸어갈 수 있는 것은 두려웠지만 결국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잊어버리신 줄 알았는데, 기억하셨네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들뜬 목소리 사이로 새는 것은 기쁨이었다.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귀여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빠요? 묻자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틀 후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했고 그는 또 설렘을 숨기지 못하며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나는 문득 그가 이제 갓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했고, 조금 도둑질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그때 봐요, 끄트머리에 다급함이 묻은 것을 그가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그 마음은 멀리 달아났다. 내가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사실이었고 나는 물을 두려워하는 나와 물에서 태어난 듯한 그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는 동시에 무시하기로 작정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휩쓸려 가 버릴지도 몰라, 막연한 두려움이 아른거리는 것도 함께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오랜만이에요.”

 

상기된 얼굴을 하고 나에 대한 호감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대범하다고 생각했다. 후에 결국 그것은 그가 감정적인 면에서 내 생각 이상으로 어리숙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버렸지만. 데이트라고 불러도 될 지 모를 만남은 순조로웠고 그와 나는 적당한 곳에서 식사를 한 뒤 적당한 곳에서 술을 마셨다. 주량을 몰라서, 많이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조심스레 그가 내어 놓은 고백에는 한참 어린 연하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 괜한 설렘마저 일었다. 나는 그 날 그에게 말을 놓았고 그는 그 날 나에게 덫을 놓았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사람을 홀려낼 줄 알았다. 볼 수록 물 같은 아이야, 그리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몇 번이고 또 연락할 수 밖에 없었다. 거창할 것 하나 없는, 데이트도 무엇도 아닌 만남들이 즐거운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와 내가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또 한 달이 지난 후였다. 멀리 가는 것은 아니었고, 당일치기로 갔다올 수 있는 근교로의 여행이었다. 대회며 훈련 때문에 일본에 오래 머무는 것이 오랜만이라고 하는 그를 위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사정을 챙기는 사람이었나 싶었지만, 지하철만 보여도 기차를 타고 싶다 말하는 그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려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내 삶에 점점 깊게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 또 잊을 수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는 줄 알면서도 나는 이 정도면, 이 정도면 괜찮다고 끊임없이 되뇌였다. 그러는 사이에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내달렸다. 가볍게 덜컹이고 흔들리는 것에 나는 이것이 일상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자각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괜찮을 거야. 비겁하다면 비겁할 자기 암시는 끝을 몰랐다.

 

내 머릿속에서 꿈틀대는 생각의 타래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옆 자리에 앉은 그는 창 밖으로 보이는 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창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훔쳐보다가 문득 밖의 풍경에 함께 시선을 두자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물에 대한 아득한 공포를 마음에 품는 나와는 딴판인 감정을 가질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답답해져왔다. 그와 나의 그 간극에 온통 물이 차올라 숨을 막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또다시, 바보같게도 나는 그가 그 물을 따라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이 언젠가 그를 휩쓸어 데려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 씨?”

 

고독한 고뇌의 심연에 너무 깊이 잠긴 나머지 나는 그가 나를 부르는 것을 채 듣지 못했다. ? 뒤늦게 눈을 맞추며 대답을 내었지만 그는 영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새파란 눈빛이 일렁이자 또 약하게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별 거 아니야, 토비오. 괜히 무릎에 얹힌 여행 책자를 만지작거리다 지도 부분을 펼쳐 그에게 보였다. 여기 봐, 우리 지금 한 이 정도 오지 않았을까? 스스로가 듣기에도 우스꽝스럽기 그지 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지도에는 한 치의 시선도 주지 않고 내 옆모습만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겠구나, 싶어진 나는 가만히 책자를 접었다.

 

토비오, 정말 별 거 아니야.”

거짓말 하지 마세요.”

 

오이카와 씨 표정, 엄청 심각했단 말이에요. 입술을 비죽이는 모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정말 별 것 아닐텐데. 결국에 나는 입을 열어 나의 공포증 아닌 공포증에 대해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어릴 적 겪은 이야기를 뭉뚱그려 중얼거리고는 물만 보면 무언가를 앗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를 간신히 털어놓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금세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손바닥을 쳤다.

 

물이 저를 데려가 버릴 것 같아서 그러시는 거예요?”

 

놀랍게도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또 입술을 비죽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물에 대한 공포라는 내 치부를 드러내 보인 것에 머릿속이 아찔했다. 아니 실은 그것보다 그가 나의 걱정을 알아버렸다는 쪽이 더욱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덜컹이며 목적지로 쉴 새 없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그는 생각에 잠겼고 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아직 그가 나의 가장 내밀한 고민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내가 물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그라는 사실을, 그가 휩쓸어가 버릴 지 모르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나와 그 사이의 그 간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우리의 사이에는 일종의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서려 깨지지 않고 있었다.

 

행선지에 다다른 그와 나는 가볍게 챙긴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다. 관광지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짭쪼름한 바닷내음이 기차역까지 퍼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배고플테니까, 일단 식사부터 할까?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굳세게 내저었다. 바다부터 보러 가고 싶어요. 꽤나 단호하게 하는 말에 나는 떨떠름하게 알겠다는 대답을 내었다. 그래, 바다 보자. 그와 나는 기차역을 나와 길가의 버스 정류장에 섰다. 20분 간격으로 적혀 있는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버스가 도착해 조금 우왕좌왕하며 버스에 탔다. 나무와 풀숲만이 우거진, 낡은 아스팔트 길을 퉁퉁거리며 달리던 버스는 이내 창 밖으로 바다를 보였다. 우와작게 탄성을 지르는 모습에 나는 푸슷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바라보면 다른 생각들에 잠식당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버스는 흙길로 잠시 접어들었다가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재차 아스팔트 위로 올라탔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달리다가 멈춰선 곳은 바다가 바로 보이는 정류장이었다. 근처 백사장의 흰 모래와 언젠가 누군가의 걸음에 쓸려왔을 마른 해초 따위가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몇 걸음만 떼면 금방 모래가 밟혔고 또 몇 걸음을 더 떼면 신발에 모래가 찼다. 나와 그는 그렇게 신발에 차는 모래를 털어 가며 바다를 향해 자박자박 걸어갔다. 인적 없는 해변에서는 짠 냄새가 진동했다. 바다 냄새 나네, 중얼거린 혼잣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도가 발 바로 앞까지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갑자기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양말만 신고 모래밭에 선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마저 벗어서는 신발 안에 구겨 넣었다.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놀랐으나 별 생각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발이라도 담그려는 모양이지, 싶은 생각이었다. 그는 이내 무릎 조금 아래까지 오는 바지를 위로 걷어올리고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지만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냐는 마음으로 그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파도를 헤치고 반대 방향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던 그는 거의 허벅지까지 물이 들어차자 뒤로 돌아섰다. 슬슬 걱정을 하기 시작한 내 눈을 마주본 그는 잠시 그렇게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몸을 돌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제 하반신이 거의 다 잠긴 그를 보며 나는 무어라 걱정하는 말을 던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느닷없이 몸을 던져 물에 뛰어들었다.

 

토비오!”

 

제일 먼저 찾아온 감정은 당연히 당황이었다. 그러나 당황에 가려졌던 시야가 탁 트이자 든 감정은 일종의 경외심이었다. 그가 수영을 하는 모습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개가 물에 잠겼다 올라왔다 할 때마다 까만 머리칼이 햇볕에 반사되어 빛났고, 팔다리가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물거품이 하얗게 일었다. TV에서 보았던 그 여름의 경기보다도 지금의 모습이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가 온전히 자연 안에서 그것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간이 물 속에서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과거를 뉘우치고자 하는 마음마저 들었고 그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영광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어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눈을 깜박이면 어느 새 그가 그 신비의 생명으로 변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자 환영은 사라지고 그가 온전히 두 눈에 들어찼다.

 

물에서 가장 아름답고, 물과 함께 유영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카게야마 토비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어느새 찰박이며 얕은 곳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몸을 닦을 수건 같은 것은 당연히 준비해오지 않았기에 나는 발만 동동 구르다가 신발과 양말을 벗고 첨벙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발목과 종아리가 물에 잠기는 감각은 이상하게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의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까지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때 나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옷이 물에 젖어들어 차가워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그랬어, 토비오?”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내가 물었다. 그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내었다.

 

,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무서워요? 조근조근 묻는 네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괜히 그의 등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 씨도 알잖아요, 아무도 절 데려가지 못해요.”

“…….”

저는,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아요.”

 

그는 나의 품에서 조심스레 벗어나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오이카와 씨 옆이에요.”

“…토비오.”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 들여다보며 나는 그가 물에 배반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어떤 것이 그를 쓸어가려 하더라도 그가 굳게 내 옆에 버티고 서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리고물은 그를 휩쓸어가지 않겠지만 그는 나를 휩쓸어가 버릴 지도 모른다. 늘 걱정하던 것이 그러나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가 물에 휘말리지 않게 태어난 것처럼, 내 인생은 그에게 휘말리게 만들어져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 다가섰다. 그의 한 쪽 볼에 손을 얹고 나직히 소리를 내어 그의 이름을 재차 불러 보았다.

 

토비오, 토비오.”

 

내가 그의 이름만을 반복해 부르자 그는 예쁘게 푸스스 웃었다. 왜 자꾸 부르세요, 하자 나는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게, 자꾸 부르고 싶네. 장난스레 던지는 말에 그는 눈을 깜박이다가 귓가를 붉게 물들였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혀뿌리가 근질거렸다. 지금이 아니라면 하지 못할 것 같은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나는 기꺼이 입술을 열어 그 말을 내었다. 아주 조심스럽지만 아주 당당하게.

 

좋아해.”

 

너는 또다시 눈을 깜박인다. 그리고 또 한 번, 예쁘게 미소짓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살풋 웃는 네게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입술에 닿는 온기가 따스했다. 키스에서는 바다 맛이 났다. 네가 내 목 뒤로 팔을 감았다. 나는 한 손을 네 허리께에 얹고 내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뿌리고 마음을 간질였다. 그와 나의 사이에 있던 투명한 막이 깨어지는 것을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의 옆에 있고자 하는 것처럼 나도 그의 옆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나는 그를 품 안에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옆에 있어줄 카게야마 토비오를.

 

눈부신 햇살이 머리 위로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