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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른] 상상의 자유

톨쟌 2016. 9. 14. 15:19





상상의 자유





햇살이 눈부시던 그날의 연습은 평소와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리시브, 토스, 스파이크, 심지어는 스트레칭 동작 하나하나까지 별난 것이 없었기에 ‘그 일’이 있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그날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의 일이 벌어진 것은 별다른 사건 없이 연습이 끝나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히나타는 리시브 연습에 열중한 나머지 발갛게 부어오른 팔뚝을 식히려 수돗가에 다녀오던 참이었고, 스가와라는 목이 타 병에 든 드링크를 마시던 중이었다. 타나카와 니시노야는 또 무슨 이야기인지 열을 내며 떠들고 있었고, 아사히는 그 옆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우카이와 무언가를 의논하는 다이치와 엔노시타의 뒤로, 야마구치는 바닥에 앉아 쉬는 츠키시마의 옆에서 무언가를 조잘거렸다. 오늘도 덥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는 그렇게 뛰었는데 안 덥겠어? 하는 핀잔이 던져졌고, 얼른 정리하자는 외침은 채 식지 않은 공기 사이에 묻혔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쿨럭, 하는 기침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쉬잉, 바람이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고-


새파란 꽃잎이 바람을 타고 소용돌이쳤다.


뭐야? 갑자기 체육관을 휩쓴 꽃바람에 모두 당황스런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꽃이 갑자기 날아 들어왔는지를 추적하는 눈길들 사이로 얼떨떨한 표정의 카게야마가 입가를 문질렀다. 왼쪽 입꼬리 옆에 묻은 파란 꽃잎을 떼서 손바닥 위에 얹자마자 다시 기침이 터졌다. 다급하게 입을 막은 손을 떼자 파란 꽃송이가 얹혀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눈살을 찌푸린 그는 잠깐의 고민 끝에 꽃을 들어 보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저, 그 꽃, 제가 뱉은 거 같습니다만.


그는 왜 갑자기 다들 입을 떡 벌리며 말을 잃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히나타 쇼요의 경우


“저기, 있잖아.”


쭈뼛거리며 말을 걸자 여자아이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으응, 무슨 일이야? 싱글거리는 표정에 히나타는 당황스럽게 입술을 씹다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너희 혹시, 그... 하나하키 병인가, 그거 알아?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웃음이 물결쳤다. 그런 건 왜 물어봐? 아까 말했던 여자아이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히나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 이걸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구르던 그는 결국 한숨을 푸욱 쉬고 대답을 내었다. 그게, 내 친구의 친구...가 갑자기 꽃을 토했다고 그래서. 변명인 것이 티가 뻔히 나는 투로 말한 그에게 또다시 웃음이 쏟아졌다. 으으, 괜히 물어봤나! 눈을 꾸욱 감고 조금 후회하기 시작한 히나타에게 의외로 대답이 떨어졌다.


“그거, 엄청 희귀한 거라고 하던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서로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 꽃을 토한대. 반짝이는 눈을 하고 말하는 여자아이에게 히나타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렇구나....... 그런 히나타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아이들은 신이 나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신기하고 로맨틱하지 않니? 아냐, 생각해보면 좀 슬프기도 해. 예쁘지만 짝사랑이잖아. 조잘거리는 목소리들 사이로 히나타는 고맙다는 말을 던지고는 도망치듯 걸어나왔다. 확실한 답을 들으니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카게야마가, 그 카게야마 토비오가 짝사랑 중이라고? 그는 재차 처음 꽃을 토하던 날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분명 저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마 하나하키 병이 무엇인지 몰랐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듣기로는 병원에도 가 보았다고 했다. 또 그 나름대로 알아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지금쯤이면 제가 꽃을 토한 원인도, 그 해결 방법도 모두 알아버렸을 것이다. 그럼, 그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까? 카게야마라면 스스로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할 가능성도 상당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고백을 하러 간다든지, 한다면? 갑자기 속이 끓어올라 숨을 훅 들이쉰 히나타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고백하고, 어쩌면 사귀기까지 하는 카게야마를 상상하니 이상하게도 뱃속이 온통 꼬이고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왜?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방과 후의 연습이 시작될 때까지도 복잡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히나타는 여느 때처럼 제게 왁왁 소리를 치는 카게야마에게 씩씩대며 맞서면서도 편치 않은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혼자만의 어색함이 가득한 연습이 끝나고 수돗가로 달려나가는 히나타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이내 그 등을 따라 발을 떼었다. 히나타는 물을 세게 튼 채로 수도꼭지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어이, 히나타.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불렀지만 히나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소리 때문인가, 카게야마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고는 다가가 수도꼭지를 잠가버렸다. 물이 멈춘 것을 알고 히나타는 고개를 벌떡 들었다.


“누구... 카게야마?!”

“뭐 못 볼 거 봤냐?”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카게야마에게 히나타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온통 물에 젖은 뒤통수를 괜히 매만지는 히나타에게 카게야마는 또 한 번 불퉁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는데. 어, 카게야마군은 귀신이 무서운 건가요? 무슨 소리야, 멍청아! 평소처럼 몇 차례의 투닥거림이 오가다 정적이 찾아왔다. 가뜩이나 불편해 죽겠는데, 이렇게 대놓고 어색한 상황이라니. 히나타는 차마 카게야마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애꿎은 손톱 옆의 살을 뜯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야, 너...”

“어, 으, 으응?!”


당황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답에 카게야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긴장에 가득 차 차렷 자세를 한 히나타를 한심하다는 표정을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이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손 관리나 잘 해. 하려던 말을 접고 몸을 돌려 체육관으로 돌아가려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히나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저, 카게야마? 카게야마! 그러나 카게야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예 반쯤 달려 체육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히나타는 잠시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이내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혹시 지금 고백하려고 했던 건가?


헐, 헐. 설마? 이성은 그럴 일이 있을 가능성이 얼마냐 되겠느냐고 핀잔을 주고 있었지만 히나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귓가를 붉힌 열기는 이내 얼굴과 목마저 점령했고 히나타는 비틀거리며 수돗가에 기대었다. 이상하게 계속 헤실헤실 바보같은 웃음이 나왔다. 카게야마가 날? 날 좋아해? 두근거리는 심장은 박동의 한계치에 다다른지 오래였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히나타의 머릿속에서 카게야마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불멸의 진리였다. 아, 어떡하지. 나 이제 곧 카게야마랑 사귀게 되는 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히나타는 당장이라도 방방 뛰고 싶은 기분으로 상상의 나래에 잠겼다. 


뭐, 상상은 자유니까.




스가와라 코우시의 경우


스가와라가 카게야마가 제법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이었다. 천재, 라는 말로 인해 만들어졌던 고정관념들이 깨어진 것은 카게야마의 의외의 모습들 덕분이었다. 예를 들자면 눈치가 부족하다든지, 공부마저 잘 할 것 같지만 전혀 아니라든지, 매일 팩에 든 요구르트를 빨아 마신다든지, 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귀엽게 보였던 것은 제게 팀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알려달라고 무작정 묻던 모습이었다. 갑작스런 의문이 찾아온 것은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던 와중이었다. 아무리 카게야마가 의외의 모습들이 있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까지 귀엽게 보일 것들인가? 홀로 고민하던 와중에 그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 나 카게야마 좋아하나봐.


한 번 자각한 감정은 순식간에 마음을 쥐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카게야마의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 보였고, 가끔은 그 비죽 튀어나오는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춰보고 싶기도 했다. 아, 어떡하지. 나 정말 카게야마 좋아하나봐. 설레고 두근대는 마음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의 일상에 전환점이 된 것은 카게야마가 꽃을 토했던 그날의 일이었다. 혹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것이 나일까, 아니 내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고민들이 마음속에 그득했다. 눈을 감으면 카게야마가 토해냈던 푸른 꽃잎들이 눈앞을 가득 메웠고 스가와라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카게야마는 자기가 누굴 좋아해서 꽃을 토하는 지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먼저 고백을 할까? 카게야마의 성격이라면 아마 먼저 고백을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상대는 받아줄까? 받아주면 어떡하지? 혹시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온갖 질문들로 혼란스러운 며칠을 보낸 후에야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다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최선을 다해 연습에 참여하면서도 히나타와 다투는 것은 잊지 않고...잠깐, 히나타? 두 사람이 왁왁대며 투닥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스가와라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게 히나타인가?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짙고 깊은 감정은 부정할 수 없는 질투였다. 확신할 수 없는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스가와라는 이성을 되찾을 수 없었다. 안 돼, 안 돼. 수백 번 되뇌이며 두 사람 쪽을 흘긋거리던 스가와라는 결국 연습을 엉망진창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스가, 무슨 일 있어? 다이치의 물음에도 스가와라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그의 두 눈은 열린 체육관 문 사이의, 수돗가로 달려가는 히나타와 그를 뒤쫓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가만히 쫓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은 점점 진하게 피어올랐고 번져나갔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영 불만스럽다는 표정의 카게야마는 이내 평소의 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스가와라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여쭤볼 게 있는데, 잠시... 손을 꿈질거리며 제게 말하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가와라는 혀가 온통 꼬여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응, 어, 그, 그래! 어디 따로 가서 얘기할까? 간신히 미소를 띄우며 스가와라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의 일대 일 대화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카게야마! 속으로 애꿎은 카게야마를 탓하던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체육관 뒤쪽으로 이끌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불안한 미소를 입에 건 스가와라는 발끝만 내려다보는 카게야마의 정수리에 대고 물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땅만 바라보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조금 놀라 뒤로 살짝 물러날 뻔 했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스가와라는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어 보였고 카게야마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또 한참을 그렇게 제 턱께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스가와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마음은 저를 향한 것인지 그를 향한 것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저, 스가와라 씨는...”

“응?”


드디어 입을 연 카게야마에게 스가와라는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아직도 스가와라에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카게야마는 몇 번 더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내었다. 열리는 입술을 보며 스가와라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닙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잘 쉬세요.”


뭐? 스가와라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반문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잠깐, 카게야마... 그를 불러세우려는 말 역시 제대로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달려가듯이 빠른 걸음으로 체육관으로 향했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가와라는 이내 머릿속에 맴도는 한 가지 가능성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방금 히나타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스가와라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카게야마, 정말 날, 설마? 그러고 보니 평소랑은 다르게 눈도 잘 못 마주쳤고, 제일 먼저 꺼낸 말도 뭔가 내 얘기였고... 설마? 상상은 또다시 무럭무럭 자라 이성을 집어삼켰다. 스가와라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채우며 중얼거렸다. 카게야마, 진짜 귀여워!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제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마음 한 구석에 접혀 들어갔다.


뭐, 상상은 자유니까.




오이카와 토오루의 경우


“뭐? 토비오쨩이?”


깜짝 놀라 소리를 팩 지르는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오이카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마냥 책상을 짚었던 오이카와는 다시 제대로 자리에 앉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이와쨩은 놀랍지도 않아? ‘그’ 토비오쨩이라고!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는 코웃음을 쳤다. 왜, 카게야마는 누구 좋아하면 안 되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응, 이라고 대답할 뻔 했던 것을 간신히 숨기며 오이카와는 씩씩대는 숨을 내쉬었다. 토비오쨩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잠시 그렇게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던 오이카와는 갑작스레 고개를 확 들어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이와쨩, 있잖아.


“그거 나 아니야?”

“미쳤냐?”

“아니, 이와쨩, 생각을 좀 해 봐!”


제 등을 향해 날아오는 매서운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오이카와는 몸을 구부린 채로 이와이즈미에게 제 나름의 가설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토비오쨩, 중학교 때엔 매일 나 쫓아다녔고, 요즘도 보면 나 엄청 의식한단 말이야. 이와쨩이 봐도 그렇지 않아? 무어라 반박을 하려고 열렸던 이와이즈미의 입은 몇 번 뻐끔거리다가 다물어졌다. 그래, 네 맘대로 생각해라. 한숨을 푸욱 내쉬는 이와이즈미의 말은 이미 오이카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토비오쨩, 나 싫은 척은 다 하더니만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제 멋대로 카게야마의 짝사랑 상대를 저로 만들어놓은 오이카와는 의자에 눕듯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아아, 이거, 고백이라도 하면 받아줘야 하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마주친 것은 그 생각을 한지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뒤였다. 


느즈막히 해가 지는 오후, 배구부 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백, 정말 받아줘? 이미 카게야마가 제게 고백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놓은 오이카와는 혼자만의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었고 이와이즈미는 도대체 무슨 헛생각을 그렇게 하느냐며 몇 번 잔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역시나 오이카와의 귀에 그런 말들이 가닿을 리가. 집 방향이 갈라지는 갈림길 앞에서 오이카와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이와이즈미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잘 가, 이와쨩! 싱글벙글 온통 웃음이 가득한 표정을 본 이와이즈미는 한껏 질렸다는 표정이 되어버렸지만.


“무슨 생각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작작 해.”

“에, 이와쨩 너무해!”

“분명히 뭔가 이상한 생각일테니까 그러는 거지.”


인사 대신 핀잔을 주고 떠난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웃음기가 조금 가신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정말 토비오쨩이 좋아하는 게 나면 어떡하지? 정말 진지하게 좋아하는 거면, 어떡해? 아니,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라도 걱정인데. 아니, 자기가 누구 좋아하는지는 알까? 알면 분명 엄청 무드 없이 고백하려고 들텐데. 생각에 잠긴 오이카와는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두 번째에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오이카와 씨! 부르는 소리는 방금까지 제가 하던 고민의 주인공이었다.


“토비오쨩?”

“여쭤볼 게 있습니다, 오이카와 씨.”


뛰어 온 듯 가파른 숨을 고르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얘가 왜 나를 보러 왔지? 무슨 말을 하려고? 물어볼 게 있다니, 그건 또 뭐야?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들은 온통 복잡하게 얽혀 실타래처럼 꽁꽁 묶였다. 그 와중에도 덤덤한 카게야마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아, 이러면 또 입술에만 온통 시선이 가 버린다고, 토비오쨩!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오이카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제 팔짱을 꼈다. 그래, 물어볼 거라는 게 뭐야? 부루퉁한 척 하는 목소리에는 기묘한 떨림이 묻어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역시나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저...”


오물거리는 입술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오이카와는 이내 카게야마가 뱉어낸 말에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질 뻔 했다.


“...아닙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소리야, 토비오쨩!”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는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 만큼은 확실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붙잡고 해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카게야마는 이미 도망치듯 목례를 하고 사라져버린 참이었다. 으으, 토비오쨩, 정말 재수 없다니까! 멀어져가는 새카만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답답해. 할 말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면 하고 가야지!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건 또 뭐야? 소리내어 툴툴거리던 오이카와는 이내 한 가지 가능성에 머리가 싹 굳어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설마, 설마...


지금 나한테 고백하려다가...?


에이,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역시나 한 번 피어오르기 시작한 생각은 쉽게 잦아들지 못했고 오이카와는 이내 카게야마가 제게 고백하려다가 그만두고는 짝사랑을 혼자 해결해 보려는 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설마, 싶지만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바보 토비오쨩이라도 그건 너무 불쌍하잖아! 오이카와는 제가 카게야마를 찾아가 먼저 고백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으으, 오이카와 씨, 너무 인기 많아도 피곤해. 안 되겠다, 내일 찾아가 봐야지. 깜짝 선물로! 아무도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것이 그라고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의 머릿속에는 벌써 카게야마가 저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히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뭐, 상상은 자유니까.




카게야마 토비오의 경우


카게야마 군, 오늘 뭔가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아? 맞아, 뭔가 전보다 얼굴도 많이 피었고... 제 뒤에서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울만큼 태연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는 요구르트 팩에 꽂힌 빨대를 빨고 있었다. 입가에는 자연스러운 미소마저 떠 있었다. 분명 뭔가 엄청 기쁜 일이 있는 게 분명해. 수군거리는 아이들 틈새로 카게야마는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왔다. 배구부 연습에 갈 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공이 팡팡 튀기는 소리가 가득한 연습이 끝나고, 카게야마는 비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습 후의 풍경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역시나 알 수 없는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그를 몰래 훔쳐보던 히나타와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괜히 큼큼, 헛기침을 했다. 카게야마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저, 카게야마가 모두를 향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다이치가 묻자 문 뒤에서는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오이카와 토오루인데, 잠시 토비오쨩 좀 보러 왔습니다만. 당당하게 내뱉는 선언에 모두의 눈이 카게야마에게로 향했고 카게야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안 그래도 모두에게, 오이카와 씨에게도 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그렇게 오이카와까지 체육관에 들어오자 마치 카게야마가 엄청나게 중요한 발표를 하는 것 같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카게야마는 모인 사람 모두를 둘러보다가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카게야마가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어? 모두 상당히 놀란 것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카게야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모두가, 특히 히나타, 스가와라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더 이상 꽃을 토하지 않아요.”


정적이 흘렀다.


“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히나타였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그에게 카게야마는 사, 사귀는 사람 생겼다고, 멍청아, 하고 제법 수줍게 응수해 주었고 히나타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스가와라는 누구든 다가오면 최악의 저주를 내려줄 것이라는 검은 오오라를 풍기고 있었고 오이카와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카게야마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러다 마주친 한 쌍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작게 한 번 눈을 깜박였다. 마치 신호를 주듯이.


안경 너머의 금안 역시 작게 한 번 깜박여졌다. 그 신호를 잘 받았다는 듯이.






히카게/오이카게/스가카게/츠키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