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무] 무제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깊은 심해와 같이 우울하고 비극적인 인생들을 담담하게, 건조하게, 메마르게, 써내려가는. 열 세 살 때부터 밤마다 제 팔뚝에 핏빛 흉터를 내오던 이의 인생도, 지독한 자기 혐오에 미쳐 제 안에 갇혀버린 이의 인생도, 손을 벌벌 떨며 저를 사랑해 줄 사람을 갈구하던 이의 인생도. 한 치의 조급함도, 한 치의 연민도, 한 치의 미련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철저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감정의 개입은 조금도 없는 그 글을 누군가는 아름답다 했고, 누군가는 잔인하다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스스로의 글에 아름답다는 말도, 잔인하다는 말도 붙이지 않았다. 그건, 그냥, 글입니다. 딱딱히 끊어지는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리무스 루핀은 이 인터뷰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작지만 아늑했던 카페 안의 공기가 조금 차갑게 가라앉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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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청량하고 상쾌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열두어 살 때부터 잡기도 힘든 몽당연필로 학교에서 가져온 종이 뒷면에 끄적끄적 무언가를 써 내려갔던 어렴풋한 기억들. 희미하게 웃으며 글이 예쁘다고, 그렇게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 천천히 둥그런 눈이 감기고, 그 위에 점점이 흩뿌려지는 피. 피투성이. 알 수 없던 말들. 하얀 천. 한숨. 눈물. 냉기. 손. 흰 손, 차갑고 흰 손. 음산한 안개와 칙칙한 비구름이 잦아들고, 드물게 맑은 햇살이 창가를 두드리던 예쁜 날에, 열 세 살의 리무스 루핀은 제 어머니를 잃었다.
간단한 장례식이 눈코 뜰 새 없이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친척들은 리무스의 거취에 대해 이것저것 논의하는 듯 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눅눅하고 비좁은 집이 전부인 줄 알았던 리무스에게, 거취가 결정되기 전까지 잠시 머물게 된 산뜻한 친척집은 작은 충격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제가 상상만 하고 글로만 써내려가던 아름다운 집이 실제로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에 리무스의 어린 마음은 한없이 들뜨고 말았다. 어쩌면 이 집에서 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조금씩, 조금씩 아이의 순수한 생각 안에 뿌리를 내리고 저도 모르게 기대라는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지독히도 향기롭고 무섭도록 아름다운 꽃을.
꽃은 위험할수록 화려하다는 것을, 아이는 꽃이 다 떨어져 버린 후에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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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고아 소년이 주인공인 여느 소설에서처럼 아이들을 때리는 원장 대신 건망증이 약간 있지만 푸근하고 다정한 아주머니 원장 선생님이 있었고, 하루 세 번 식사도 꼬박꼬박 할 수 있었으며, 낡은 이불은 조금 곰팡내가 났지만 제 역할에는 충실해 밤마다 추위에 떨 일은 없었다. 다만 원생들이 리무스보다 어린 아이들 뿐이라, 리무스는 졸지에 맏이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무릎이 까져 절뚝거리는 아이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것도, 식사 중 실수로 물을 잔뜩 흘려버린 아이의 옷을 닦아주는 것도, 한밤중에 악몽을 꾸고는 와앙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달래주는 것도 모두 리무스의 일이 되었다.
아이들을 보면서 리무스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슬플 때, 아플 때, 당황스러울 때, 놀랐을 때, 겁을 먹었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어린 아이들은 무수히 많은 순간들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중, 여타 또래처럼 ‘엄마'를 찾는 아이는 드물었다. 처음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들은, 눈물이 날 때 마다 조그만 입으로 열심히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그렇게 엄마를 찾아도, 더 이상 엄마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은 서서히 엄마를 찾는 일을 그만두었고, 눈물이 날 때 마다 입술을 꾸욱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리무스는 그 모습에 저를 투영했다. 햇살이 아름다웠던, 공기가 싱그러웠던,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그 집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며칠간을 떠올렸다. 기대가 짓밟히고 무너지던 날을 생각했고, 조금씩 그 집을 잊어가며 고아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있는 제 모습을 돌아보았다. 결국, 다 잊는거라고. 꿈이라는 건, 희망이라는 건, 전부 다 포기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거라고. 그렇게 환상을 품고 꿈을 그리던 어린 아이 리무스 루핀은, 그 맑은 눈동자에 탁한 현실의 물감을 타기 시작했다.
그래도 글을 쓰는 것 만큼은,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며 글을 써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것만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 그 하나 남은 마지막 꿈마저 포기해 버린다면, 이 세상에서 숨을 쉬는 이유가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그저 멍한 눈빛으로 꾸역꾸역 매일을 살아가는 텅 빈 몸만 남을 것 같아서, 제 눈을 반짝이게 해주는 것 하나는 남겨놓고 싶었다. 가슴을 뛰게 하는 뭔가는 남겨놓아야, 현실 앞에서 무너져 버린 저의 나약함을 변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마다 펼쳐지는 작은 노트에는 그렇게 리무스의 마지막 꿈이 아로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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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리무스는 모범생이었다. 성적도, 행실도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저와 비슷한 성적대의 아이들과 적당히 어울리곤 했고, 선생님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았다. 현실을 처음 자각한 중학생 시절의 어느 날부터 리무스 루핀은 그렇게 바르고 착실한 학생의 얼굴을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교 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면, 우리 고아원을 후원해주시는 분께서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실 수도 있단다, 하고, 원장 선생님이 어느 날 스치듯이 던진 그 한마디가, 현실의 무게를 알게 된 리무스를 스쳐가기는 어려웠다. 대학에 가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고 아름다운 글을 많이 쓰고 싶다는 욕망을 조심스럽게 숨겨둔 채, 리무스 루핀은 이상적인 학생의 모습을 연기했다.
하지만 여태껏 그랬듯이, 삶은 그가 생각한 것 처럼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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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떠나버렸다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실은 엄청난 부자였다든지, 아니면 어느 나라의 왕족이었다든지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들은 대여섯 살의 리무스에게는 언젠가는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현실이었다. 열 살 즈음엔 그 상상들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고, 열 두어 살 때는 대단하지 않은 아버지라도 제 앞에 나타나 온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꿈꿨으며, 어머니가 죽던 열 세살 때에는, 어쩌면 제게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가 올 것이라고 믿다가,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결국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고 마음먹었는데.
하늘이 맑아 기분이 좋았던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제 방에서 조금씩 써 놓았던 글을 손보려고 마음먹으며 고아원으로 향한 리무스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원장 선생님이 찾으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원장실로 향했다.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는 문 너머로, 초면인 것이 확실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은 얼굴을 한 남자가 보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입가과 눈가의 얇은 피부에 연하게 진 주름을 빼면, 놀라울 정도로 저와 닮아 있는 남자를 본 리무스는 인상을 찌푸려야 할 지, 눈물을 흘려야 할 지, 화를 내야 할 지, 그것도 아니면 미소를 지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일일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사정이 있어 어머니와 헤어져야만 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전해 들었다고 했다. 리무스가 고아원에 들어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당장 찾아오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이제 성인이 되기까지 몇 년 남지도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다고, 보호자가 되어 주고 싶다고, 가족이 되어 주고 싶다고 했다. 이런 자신이라도 괜찮다면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한다고 했다.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 말들이 어지러웠다. 여태껏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이렇게 떡하니 제 앞에 나타나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 혼란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왜 어머니를 떠났고, 왜 어머니가 죽은 것조차 알지 못했고, 왜 제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찾아오지 않았는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그 다음으로 피어올랐다. 이어서 어머니와 단 둘이었지만 가족이 있었던 시절의 기억들이 흐릿하게 스쳐지나가며 가슴을 먹먹하고 뜨겁게 물들였다. 다음 순간 그는 반쯤 충동적으로 함께 살고 싶다는 말을 내뱉었다.
지금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린다면 리무스 루핀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는 지독하게 외로웠던 모양이라고. 아니면, 지나치게 현실에 목을 매어 따스한 무언가를 잃어가는 것에 지쳤던 모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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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놀라울 만큼 괜찮은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인 듯 했으나 다정하고 따스했다. 꽤나 이름있는 회사의 상당히 높은 직책을 맡고 있던 터라 생활은 풍족했고 여유로웠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남아있는, 맑은 햇살이 들던 친척집보다도 더 좋고 넓어 보이는 집에서 살게 되었고, 지금껏 먹어본 적 없던 좋은 음식을 매일같이 먹었고, 군데군데 기워지고 품이 큰 낡은 옷 대신 딱 맞는 깔끔한 새 옷을 입게 되었다.
아직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느닷없이 너무 세련되어진 삶에 적응하기 힘들기도 했지만, 리무스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저를 아껴주는 사람과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냐고, 어릴 적 꿈꾸었지만 결국 포기해 버렸던 아름다운 집에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최고의 행운이 아니겠냐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리고 진실은 때로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무거운 동시에 믿을 수 없이 가볍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 무겁고도 가벼운 무게를 리무스가 안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해가 시작되기 직전의 여름이었다. 어느 맑은 주말 오후 느닷없이 쾅 하고 열린 현관문과,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집 이곳 저곳을 뒤적이던 긴 플라스틱 지팡이,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제 아버지에게 다가가 분노에 찬 말들을 쏘아붙이는 나이 든 여인. 제 아버지와, 그리고 저와 꼭 닮은 입에서 뱉어지는 진실. 몸 파는 것한테 빠지더니, 이제 그 아이까지 거두는구나.
아버지의 어머니, 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이지만, 차마 그렇게 부를 수 없는 그 사람은, 제 어머니가 몸을 팔았다고 했다. 당신이 그렇게 가르치지도 키우지도 않은, 부족한 것 하나 없는 당신 아들이 도대체 왜 창녀를 만났던 거냐고, 한순간의 실수라고 생각하려 했는데도 왜 그리 말을 듣지 않았냐고, 이렇게 몰래 천한 년의 아이를 데려다 키우면 당신이 모를 것 같았냐고, 너무 쉽게, 그러나 동시에 무겁게 리무스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머리가 멍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밖, 어딘지 모를 공터에 와 있는 자신의 모습에 리무스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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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오는 일이 생기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멍한 눈으로 저를 다시 돌려보낸, 아마 이제 다시 볼 수 없을 아버지를, 그 청명하고 아름다운 눈을 하곤 몸을 팔았다던, 역시 다시는 볼 수 없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리무스는 아무래도 제 운명의 책에 행복이란 적혀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낡은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듯 제 안으로 마음을 웅크렸다. 옷장에는 다시 낡은 옷 몇 벌이 자리했고, 연갈색 눈동자는 다시 빛을 잃었다.
그 다음 봄은 조금 흐리고 쌀쌀했다. 큰 후원자들 중 한 명이 후원을 중단했다고 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원장 선생님에게 리무스는 애써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사실 그렇게 대학에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합격 통지서는 구겨지고 찢겨져 쓰레기통 밑바닥에 처박혔다. 텅 빈 눈동자에는 눈물조차 고이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아원을 나왔다. 무섭도록 맑은 햇살 아래, 낡은 옷가지와 노트 몇 권만이 든 가벼운 가방을 든 리무스는 제일 먼저 아무도 오지 않는 빈 공터를 찾았다. 제가 그동안 적어온 꿈과 환상을, 맑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는 희망을 담은 노트들을 꺼내 쌓고는, 마지막으로 받은 적은 돈 중 일부를 떼어 산 라이터를 꺼냈다. 틱, 틱, 엄지를 놀려 서툴게 켠 라이터를 맨 위의 노트 끄트머리에 갖다 대었다. 불꽃이 옮겨 붙으며 조금씩, 조금씩 노트가 타들어갔다. 한 권, 두 권, 세 권, 그리고 마침내 전부.
태울 것을 잃은 불꽃이 사그라드는 모양이, 제 마음 속의 마지막 빛이 꺼지는 모양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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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고 행복해지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울타리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제게 사치라는 것을 온전히 깨달은 리무스에게 남은 것은 현실을 악착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생존 본능이었다. 시작은 몸을 쓰는 노동이었다. 공장이든 건설 현장이든, 단순 노동만큼 잠시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는 일은 없었다. 몸을 혹사시키며 일하는 순간에는 한밤중의 악몽도, 새벽녘의 우울함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그 모든 것에 무덤덤해질 때 까지, 리무스는 그렇게 제 몸을 채찍질했다.
다음은 좀 더 복잡하지만, 좀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상냥한 말투를 꾸며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좋은 재능이었다. 제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그저 친절히 웃으며 누군가를 상대하는 일. 장소가 음식점인지 카페인지 바인지는 상관이 없었다. 화려한 외모도, 유려한 말솜씨도 없지만, 친절의 가면은 누구에게나 통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용했다.
리무스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아도 잠잠히 눈길을 사로잡고 신경을 쓰이게 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리무스가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일하던 카페의 단골 손님에게 명함을 받았다. 작은 잡지사의 편집장이라고 했다. 관심이 있으면 연락해요. 보조 사원이 필요한데, 싹싹하니 잘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제게 다가온 새로운 길의 입구를, 리무스는 놓치지 않았다.
보조 사원은 정말 말 그대로 보조 사원이었다. 서류 복사와 커피 나르기로 가득한 하루하루 속에서도 리무스는 웃는 얼굴 뒤 날카로운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현실은 각박하고 어렵고 무겁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배웠기에 리무스는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회는 그런 사람에게 찾아온다. 아니, 그런 사람이 기회가 찾아오는 순간을 잡아챈다.
잡다한 소식을 담아 발행하는 월간지에,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도서 관련 코너를 추가하기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코너를 담당할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소규모 회사이고, 코너 자체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껏해야 한 두 페이지를 차지할 코너이기에 기획과 자료 수집, 칼럼 작성까지 한 사람, 많아도 두 사람이 해내야 하는데, 그 한 두 사람을 맡을만한 사람이 없었다. 리무스는 조심스럽게 편집장을 찾아가 입을 뗐다. 새 코너를 맡을 사람을 돕게 해 달라고.
리무스 루핀이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이렇게 패기를 발휘할 줄도 아는 날카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편집장은, 리무스가 들고 간 기획안과 자료들을 잠잠히 훑어보고는, 칼럼을 쓰는 것 까지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어쩌면 얼마 뒤 사라질지도 모르는 코너이기에 그에게 맡길 수 있었던 것이지만, 리무스는 당차게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작든 크든 기회는 기회다. 기회는 잡지 않으면 떠난다. 잡지 못하면 떠난다.
한 가지 마음에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비록 제가 쓰려던 글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글을 쓰게 되면 기쁠 줄 알았다. 다시 꿈을 피울 기회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조금의 기쁨과 설렘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리무스 루핀이 느끼는 것은, 기쁨과 설렘이 아닌 맹렬한 생존 의지 뿐이었다.
그렇게 리무스는 조금씩, 느리게, 그러나 차근차근, 확실하게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보조 사원에게 덜컥 새 코너를 맡길 수는 없다는 주변의 말들과,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코너라는 불안한 위치를 견디고 꿋꿋이 제 일을 해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리무스는 놀라울 만큼 제게 맡겨진 일을 해내고 있었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얻은 리무스의 입가에는 조금 진심이 담긴 미소가 맺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눈은, 예전의 그 반짝이는 눈 만큼은, 기억도 해낼 수 없을 만큼 아득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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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무스는 요즘 신인 작가들을 인터뷰해 잡지에 싣고 있었다. 능수능란한 말주변은 여전히 없지만, 차분하고 담담히, 진지하게 이어가는 리무스의 길지도 과하지도 않은 인터뷰는 무난히 작가들의 호감을 얻었다. 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는 것이 느껴지는 리무스의 질문에 오히려 감사하다며 역으로 인사를 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글만큼 깊게, 애정을 담아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리무스의 인터뷰는 작가보다 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차피 글에는 작가가 담기기 마련이니까, 하는 생각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인터뷰하게 된 작가는 조금 달랐다. 온통 우울하고 처절한 내용으로 가득한 첫 단편집이 주목을 받아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유명세를 얻은 작가였다. 꼭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로 묶은 검고 긴 머리칼과 화려한 미남형의 이목구비, 사소하고 작은 행동과 내뱉는 말들 하나하나에서 자존심과 똘똘 뭉친 고집이 묻어났다. 불친절했고 심드렁했다. 묻는 질문에마다 짧은 답을 성의 없이 중얼거렸고.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독한 외로움의 향이 났다. 왜일까.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준비해오지도 않았고 지금껏 던져본 적도 없던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의 글은 모두 짧지만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담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작가님의 인생을 그렇게 한 개의 이야기로 쓴다면, 어떻게 쓰시겠어요?”
그, 시리우스 블랙의 표정이 순간 놀랍도록 굳어졌다. 여유로움의 가면을 쓰고 있던 무언가가 잠시 그 가면에서 벗어나 제 모습을 드러낸 몇 초의 짧은 시간이, 리무스에게는 무섭도록 느리게 흘렀다. 그 느릿하고 짧은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여유와 불친절을 뒤집어 쓴 시리우스는 처음으로 무언가 곰곰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 입을 열었다.
“모든 걸 가졌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가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인생, 이라고 표현하지 않을까요.”
문득 그의 두 눈에 서린, 슬픔인지 분노인지 후회인지 절망인지, 아니면 그 중 어느 것도 아닐지 모르는 감정. 스치듯 지나간 그 무언가의 소용돌이를 저도 모르게 포착해버린 리무스는, 보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것을 보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묻고 싶고, 듣고 싶고, 알고 싶다는 충동이 순간 마음속에서 용솟음쳤지만, 리무스는 애써 그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았다. 시리우스는 다시 여유롭고 초연한 눈빛을 썼지만, 그 눈동자 안에 숨겨진 것들을 살짝 엿본 리무스에게는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저의 아무것도 없어서 무언가를 입혀야 하는 눈과는 다른,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서 아무것도 없는 척 해야 하는 두 눈 때문에, 리무스 루핀은 시리우스 블랙에게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꼈다.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데에서 오는 이질감과, 저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동질감은, 리무스의 마음 한 구석에 석연찮은, 뜨거운, 무게를 남겼다. 동정심도 공감도 분노도 슬픔도 그 무엇도 아닌 묵직한 감정은,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가려는 의지만이 가득했던 리무스의 마음을 쿵, 떨어뜨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 지 몰라 가만히 입을 다문 리무스에게 시리우스가 가만히 말을 건넸다.
“실언을 했군요. 방금 그 말은 싣지 말아주시죠.”
“아, 네.”
이후의 인터뷰는 리무스의 느닷없는 질문 이전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작품 중심의 질문들과 짧고 불친절한 대답들, 그리고 그 대답들에서 다시 뻗어나오는 질문과 또 그 대답. 여전히 리무스의 가슴 한 구석에서 존재감을 풍기고 있는 묵직한 어떤 감정은 해소되지 못했고, 그렇게 결국 짧은 인터뷰는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리무스는 시리우스에게 인사를 하고는 녹음기를 꺼 정리했다. 벗어두었던 코트를 걸친 시리우스는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챙기는 리무스의 정수리에 대고 빠르게 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그러고는 제가 미처 답을 할 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나가 버리는 시리우스의 모습에, 리무스는 가슴 한 구석의 무거움이 왠지 모르게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급하냐고 속으로 조금 궁시렁거리며,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 속의 무언가를 의식하고 헛기침을 했다. 느릿느릿 가방을 마저 싸고, 테이블 위의 잔 두 개를 바라본 리무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시리우스의 잔 안의 라떼는 거의 줄어 있지 않았다. 이럴거면 뭐하러 시켰대, 또 괜히 툴툴거리며 불편함을 잊으려고 해 보았지만, 가슴 속의 무게는 점점 더 가라앉으며 무거워져 갈 뿐이었다.
가방을 들고 카페 문 앞에 선 리무스는 심호흡을 했다. 알 수 없는 이 무게감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왜 생겨난 것인지도, 정체가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부서질 것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알 수 없는 것도, 잘 아는 것도, 결국 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져 오직 현실을 사는 데 필요한 본능만 남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리무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무시하기로 했다.
설사 이것이 제 마음에 뿌리를 내려 박고, 조금씩 줄기를 뻗어 마침내 꽃을 피워내려 한다고 해도, 져버릴 꽃은 피우지 못하도록 잘라버릴 것이라고. 어렴풋이 정체를 알 것 같은 감정이지만, 모르는 체 없는 셈 치고 살아갈 것이라고. 리무스는 마음에 던져진 무거운 씨앗을 그렇게 죽일 것을 다짐하며, 오랜만의 밝은 햇살 사이로 발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