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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HQ

[오이카게] 벚꽃, 꿈

*오이카게 전력 60분 11회차 주제 ‘벚꽃' 참여했습니다:)

*영화 <인셉션>의 세계관을 차용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림보'를 배경으로 합니다. '림보'는 꿈 속의 꿈 속의 꿈을 반복했을 때의 가장 밑바닥, 가장 깊은 무의식의 늪으로, 한 번 빠지면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한 채 무한대에 가깝게 늘어난 시간동안 머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빠져나오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 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이카게] 벚꽃, 꿈



   무의식의 바다에서 철썩이는 파도를 맞으며 깨어난다. 입과 코로 들어오는 물을 뱉어내고,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일어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불규칙하게 뻗은 회색의 높다란 건물들. 폐허가 되어 금방이라도 파스스 무너져버릴 것 같은 이 음침한 직육면체의 집합을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까. 색이 바랜 사진들로 가득한 낡은 앨범처럼, 한때 누군가의 추억이었을 공간들이 위태로이 서 있는 것을 보며, 오이카와는 새삼 지나간 일들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물에 젖어 진흙마냥 축축해진 모래가 신발에 들러붙지 않도록 발을 뗀다.



   높은 건물들의 그림자 사이로 한참을 걷다 보니, 어디선가 꽃잎 한 장이 날아와 발치에 내려앉는다. 오이카와는 무릎을 굽혀 꽃잎을 집어든다. 연분홍빛 벚꽃잎이다. 꽃잎을 손바닥 위에 얹어놓고는 잠시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피식, 힘 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주먹을 꼭 쥐어 꽃잎을 손 안에 가두고는 다시 발을 뗀다. 입가에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다. 발걸음이 조금씩, 조금씩 빨라진다. 바람이 불 때 마다 날아오는 꽃잎이 한 장, 두 장 늘어난다. 마침내 시야까지 가리며 함박눈처럼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에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발견한다.



   한때는 아늑한 오두막집이었을 것 같지만, 이제는 다 무너져가는 폐가의 중심부에서 굵직한 나무 줄기가 뻗어올라간다. 그리고 그 줄기에 달린 수십개의 가지들은, 부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많은 꽃들을 매달고 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은 바람이 불 때 마다 흩어져 휘날린다. 그리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 새로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꽃. 그 과정을 쉴새없이 반복하며, 영원히 지고 또 피는 거대한 벚나무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이다. 오이카와는 나무 아래에 기대 앉아 있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애써 입을 연다.



   “대단하네, 토비오쨩. 괜히 천재가 아니야.”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는 오이카와를, 카게야마는 무표정하게 올려다본다. 검푸른 눈동자에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들어있지 않다. 무섭도록 텅 빈 그 눈동자에, 오이카와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래, 이 녀석을 데려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나, 곤란하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한 벚나무를 올려다보며 낮게 한숨을 쉰다. 슬픔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짙고 흐릿한 감정이 갈색 눈동자를 빠르게 스친다.



   카게야마의 동료, 라고 표현해야 할까. 거의 항상 두 사람이 한 묶음 마냥 함께 일했으니, 파트너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 얼마 전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그의 소식에, 오이카와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얼마나 카게야마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게야마에게 꿈을 공유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그를 이 세계로 끌고 들어온 것이 그였다. 그 때문인지,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라 여기는 한 마리의 어린 짐승처럼, 카게야마는 그를 무서울 정도로 따르고 의지했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은 알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내려올 필요는 없었잖아?”



   조금 부루퉁한 목소리를 내며 짐짓 화난 척을 해 보아도 꿈적하지 않는 카게야마를 보며, 오이카와는 한숨을 쉰다. 하필이면 만들어 놓은 게 벚나무일 때부터 알아봤어, 작지 않은 소리로 대놓고 중얼거려도 들은 둥 만 둥 하는 카게야마의 모습에 오이카와는 조금 화가 나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다.



   “고집 센 토비오, 못난 토비오, 오이카와씨가 여기까지 왔는데도 관심도 없는 토비오.”



   무겁지 않게 툴툴대듯 불만을 내뱉으며, 팔짱을 끼고 흥, 하는 소리까지 내는 오이카와를 고요히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마침내 잠잠히 입을 연다. 간신히 열린 입에서 나온 말은, 오이카와가 예상했던 말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벚꽃을 좋아하셨습니다.”



   그 사람 얘기구나. 오이카와는 본능적으로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봄이 되면 꼭 벚꽃을 보러 다니셨는데, 그 길에 꼭 저를 데려가셨어요.”



   그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틱틱거리는 말투로 쏘아붙이려다가, 꿈꾸듯 말을 잇는 카게야마의 모습에 문득 가슴이 아리다. 오이카와는 묘하게 욱신거리는 가슴이 불만스러운 듯 팔짱을 풀고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척 한다. 생각보다 조금 큰 소리로 나와버린 헛기침에 스스로도 당황한 듯 눈을 데구르르 굴리지만, 카게야마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차분히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생각보다 조금 더 아파서, 오이카와는 주먹을 꽉 쥔다.



   “여기 오면, 여기까지 오면, 이렇게 벚나무를 만들어 놓으면...오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러고는 슬픔인지, 아쉬움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오이카와는 울컥, 쏟아져나와 버릴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른다. 당연하지, 바보같은 토비오. 그 사람은 죽었어. 아무리 꿈 속이라고 해도, 네가 아무리 기다린다고 해도, 그 사람은 이제 다시는 오지 않아. 너도 알잖아, 네 무의식이 그 사람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건, 너도 그 사람이 다시 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잖아. 토비오, 토비오... 뱉지 못할 말들이 온 몸에 가득하다.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든다. 애써 담담한 척 입을 연다.



   “얼마나, 기다렸어?”



   현실에서의 1분이 1년일지도, 10년일지도, 100년일지도 모르는 시간으로 무한정 늘어나버리는 이 무시무시한 공간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냐는 그 물음에, 카게야마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기다가 대답한다.



   “10년, 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얼마나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서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카게야마를 끌어안는다. 그 오랜 시간동안, 이 공간에 홀로 남아, 영원히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린 카게야마가 답답한 동시에 안쓰럽다. 격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얽혀 흔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뗀다. 어느 새 잊고 있던 뒷주머니의 무게감이 선명하다.



   “돌아가자, 토비오. 돌아가자.”



   카게야마가 손을 뻗어 부들부들 떨리는 오이카와의 등을 어루만진다. 잘게 저를 토닥이는 그 손길에, 오이카와는 조금 눈물이 나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참을 그렇게 토닥이다가, 카게야마가 입을 연다.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카게야마가 조심스레 오이카와의 품에서 벗어난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작은 권총이 어느 새 카게야마의 손에 들려 있다. 조심스레 총구를 한 쪽 머리에 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다. 그리고, 여전히 흩날리고 있는 하얀 꽃잎들 사이에서, 카게야마가 희게 빛나는 미소를 짓는다. 오이카와도 뒷주머니의 권총을 꺼내, 총구를 제 머리에 댄다. 카게야마의 웃음이 처절하게 아름다워서, 아무런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카게야마가 내뱉는다.



   “같이, 돌아가요.”

 


   한 발의 총성에 꽃잎이 놀라 휘몰아친다. 그득히 쌓인 꽃잎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벚나무 아래에, 다시 피지 않을 꽃들이 지어 떨어진다. 그리고, 바람이, 서서히, 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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