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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HQ

[스가카게] 봄, 봄

카게른 전력 60분 40회차 주제 '변화' 참여했습니다:)





   깊은 심해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발목을 붙잡는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 보아도, 더욱 단단하게 나를 끌어당기고, 끌어당기고, 끌어당기는.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손에 이끌려, 결국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심해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기분에, 고개를 젓고 팔을 휘둘러도, 느껴지는 것은 이상하리만치 무거운 바닷물의 무게. 그 무게에 눌리고 압도되는 그 순간에 문득, 미친듯이 휩쓸려 코 속을 가득 채우는 짠 물의 흐름에 숨이 막히고 머리가 무거워진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바다, 바다만이 가득한 그 감각.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깬다.




[스가카게] 봄, 봄.




   “간밤엔 잘 잤나요? 피곤해 보이는데.”



   스가와라 코우시, 나의 봄볕과 같은 사람. 해사한 미소와 다정한 눈빛을 보며 나는 당신을 그렇게 이름붙인다. 눈부신 봄 햇살이 병실 창문을 타고 들어와 당신의 은빛 머리칼을 반짝이는 것을 보며, 나는 조금 얼굴이 붉어질지도 모르겠다. 따스하게 내게 건네는 말에 나는 바보같이 눈만 깜빡인다. 피곤해 보인다는 말에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간밤에 꿈에서 깬 후로 한 숨도 자지 못한 것이 후회되어 괜히 침울해지는 나를, 당신이 다시 저 위로 끌어올린다.



   “오늘은 좀 잘 쉬어요. 걱정되네.”



   정말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그렇게 다정히 내게 말을 건네는 당신을 보며, 나는 또 봄을 생각한다. 봄의 햇살을 생각한다. 제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찬 바람도 모두 이겨내고야 마는, 그 봄날의 따스함을 떠올리며 당신을 본다. 투명한 고동색 눈동자에 서린 것이 놀라울 만큼의 진심이라, 마음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졌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그렇게 설렘이 피어오르는 심장에, 안타깝게도 당신은 조금 찬물을 끼얹는다.



   “약 잘 먹고 있죠? 너무 세지 않은가 모르겠네.”



   차트를 넘기며 내 기록을 확인하는 당신의 모습에, 나는 다시금 깨달아버린다. 우리는 사실 우리라는 말로 엮일 수도 없는 관계라는 것을. 당신이 보는 수많은 환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한 나는, 당신에게 아주 조금도 특별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의 말과, 한 번의 몸짓으로 그 간극을 깨닫게 만들어 버리는 당신이 조금, 아주 조금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신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은, 당신을 마음에 담아 버린 나의 잘못. 나는 입을 열어 조그맣게 대답을 뱉는다.



   “잘, 먹고 있어요.”



   하지만 그 몇 알의 약보다, 당신의 웃음 한 번이, 당신의 따스한 말 한 마디가,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 한 번이 더 힘이 된다는 말은, 조용히 목 뒤로 삼켜낼 수 밖에 없다.



_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는다. 눈을 감고, 처음 당신을 만났던 날을 떠올린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틀어 놓았던 조금 낡은 히터가 덜덜거리던 소리부터, 창문 사이로 옅게 비치던 햇살과, 병실로 찾아와 맑게 웃어 보이며, 앞으로 내 주치의를 맡게 된 스가와라 코우시라고 인사하던 그 모습. 아직도 선명한 그 기억을 떠올리면 입가에 조금 미소가 뜰 것도 같다. 마지막으로 웃었던 것이 언제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당신을 생각하면 조금 웃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느릿느릿 눈을 뜨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햇살이 여전히 눈부시다.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 날, 눈을 살풋 접어가며 웃는 당신의 시선이 문득 내 팔뚝의 거무죽죽한 흉터들로 향했을 때, 나는 사실 조금 두려운 마음에 괜히 이불 속에서 발끝을 마주 대고 바르작거렸다. 이번에 오는 것은 부담스러운 동정일까, 차가운 무관심일까. 나는 조바심이 나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시선을 내리깔았더랬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햇살과 같은 당신은, 여태껏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해주었다. 꼼질거리던 발짓이 뚝 그치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카게야마 군이 아프지 않았으면 해요. 카게야마 군도 아프고 싶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들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스워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진지하고, 따스하고, 다정하고,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또박또박 뱉는 말에 나는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어지럽지만, 기분 좋은, 그런 복잡한 무언가.



   “나는 그래서 카게야마 군이 상처 입지 않도록 지키고 도울거예요. 카게야마 군이 스스로 힘을 낼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러고선 입꼬리를 쓱 올려, 마치 저를 믿어달라는 듯이 웃어 보이던 그 맑은 얼굴을, 나는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봄은 그렇게, 아직 조금 쌀쌀한 겨울의 끝자락에, 웅웅 울리는 히터 소리와 잔뜩 긴 구름 사이로 간신히 스미는 햇살 사이에서, 남들에게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다.



   다시 새겨지는 기억에 조금 쑥스러워져 머쓱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문득 간밤의 꿈을 떠올린다. 잡힌 발목의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한 나머지 병원복을 걷어 발목의 손자욱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를 찬찬히 생각해 보다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지른다. 아아, 나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매일 그런 기분 속에서 살았다. 매일을 누군가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는 느낌과 함께, 온 몸을 잠식하는 우울과 함께,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 꿈은 나의 삶이었고, 나의 하루였다.



   그리고, 어느 새 내 봄과 같은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당신을 생각하면 눈이 부신 햇살이 떠오르는 것은, 깊은 바다의 어둠이 아닌 높은 하늘의 빛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꿈 속의 깊은 심해로 끌려들어가던 순간을 되새기며 눈을 감는다. 넘실거리는 바다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빛줄기가, 바다 아래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아른거리는 햇살을 떠올리며 느릿하게 팔을 들어 손을 뻗는다. 닿고, 싶다. 당신이란 햇살에 닿고 싶다. 그러다 문득,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실감한다. 팔을 내리고 눈을 뜬다.



   창 밖의 하늘은 맑고 푸르다. 가늘게 눈을 뜨고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린다. 통이 넓은 병원복 소매 사이로 거뭇거뭇한 흉터들이 보인다. 스스로 낸, 절대 사라지지 않을 그 흉터들을 바라보다 눈을 뗀다. 나는 지금 스스로 힘을 낼 수 있을까, 조금 생각해 본다. 아직이다, 아직. 아직은 당신이 필요하다. 아직은 당신의 그 다정함이 필요하다. 봄의 햇살이 갈급하고, 은빛 반짝임에 목이 탄다. 나는, 아직 당신이 없으면 힘이 나지 않아요. 조그맣게 중얼거려보다가, 문득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떨군다.



   닿을 수 없는 나의 봄에게, 나의 햇살에게 위로받는 것은 얼마나 아픈 일인지, 나의 애타는 시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먹먹한 일인지, 나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소중하게 아끼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문득 마음 속을 가득 채워놓는 그 수많은 감정들이 무거워 나는 한 손으로 가슴께를 부여잡는다. 무언가 가득 쌓여 토해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에, 다급하게 입을 연다. 감정들이 한 마디의 말로, 짤막한 그 말로 응축되어 뱉어진다.



   “좋아, 해요.”



    가쁘게 뱉어낸 말은 천천히 사그라든다. 결국 쏟아내고야 만 그 감정에, 나는 잘게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는데. 다시 눈을 감고 나는 나의 봄을 본다. 나의 눈부신 봄 햇살을 본다. 닿을 수 없게 저 멀리에 있는 그 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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