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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스가카게/우시카게] 고백하는 날




[오이카게/스가카게/우시카게] 고백하는 날

 

*캐붕대잔치 주의

 


 

1.     오이카와 토오루의 경우

 

있잖아, 이와쨩. 나 잘생겼지?”

 

연습이 끝난 후 체육관을 정리하다가, 오이카와는 문득 뜬금없는 질문을 내뱉는다. 앞서가다 슬쩍 뒤를 돌아보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또 무슨 헛소리지, 하는 표정이 뜬다.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에게 오이카와는 입술을 댓발 내밀며 재차 묻는다. 대답해봐, 이와쨩. 나 안 잘생겼어? 잘생겼지? 그냥 잘생긴 정도가 아니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미남이지? 그렇지? 연달아 쏟아지는 질문들에 이와이즈미는 대답해 줄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린다. 쿠소카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이와쨩,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오이카와상 상처받는다고!”

 

저러다 삐지면 답도 없지, 이와이즈미는 푸욱 한숨을 내쉬고 오이카와를 돌아본다. 한숨 너무 티나게 쉰다고, 이와쨩. 팔짱까지 껴 가며 잔뜩 토라진 척을 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이와이즈미는 조금 망설인다. 그러나 이내 엣다 모르겠다, 무심한 척 입을 뗀다.


, 봐줄 건 그나마 얼굴밖에 없긴 하지.”

에엑, 너무해 이와쨩!”

 

그래도 잘생긴 건 인정하는 거지, 그렇지? 또 졸졸 따라붙는 오이카와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와이즈미는 다시 뒤를 돌아본다. 누가 잘생겼다고 안 해도 자기가 잘생겼다는 걸 너무 잘 아는게 문제인 인간인데, 도대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꾸 물어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도 뭔가 고민에 잠긴 표정이었던 것 같고.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다시 저를 향하자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이 된 오이카와에게 던져진 것은 느닷없는 질문이다.

 

무슨 일 있냐?”

, , 일은 무슨!”

 

손사래까지 쳐가며 잡아떼더니 티나는 억지 웃음까지 지어보이는 오이카와를 보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없긴 무슨. 차였냐? 직설적인 질문에 오이카와가 얼어붙는다.

 

하나, , .

 

내가 어디서 차이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차였네.”

 

삼 초의 정적 후 다급히 내뱉는 변명 같은 반문은 별 신빙성이 없다. 아니래도, 이와쨩! 열심히 부정해 보지만, 이미 늦은지 오래다. 어떤 여자인지 몰라도 눈이 꽤 높나 보네, 저 오이카와가 자기 얼굴 갖고 고민하게 만들 정도면. 가만히 생각에 잠긴 이와이즈미를 보며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쉰다. 차인 거 정말 아닌데. 할 수 없다는 듯, 오이카와는 풀죽은 얼굴로 입을 뗀다.

 

차인 건 아닌데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봐.”

그게 차인 거랑 뭐가 달라?”

 

이와쨩! 빽 소리를 지르는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는 다시 얼굴을 찌푸린다. 널 마음에 안 들어 하면 그게 결국 차인거랑 다름없지 않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이와이즈미에게 뭐라 받아쳐주지 못하던 오이카와가,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을 실토한다.

 

“…고백도 뭣도 못 해봤으니까, 차인 건 아니야. 차일 건덕지도 없는 거지.”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뭐라 중얼거리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이와이즈미는 당황한다.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제가 좋아하는 아이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며 침울해하던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자신감 없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 오이카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러도 다른 생각에 빠진 듯 대답이 없다. 정신 차리라고 등짝이라도 한 번 때려야 하나? 아니, 지금 그러면 역효과만 나려나? 단짝 친구의 낯선 모습에 이와이즈미는 어찌 할 줄 몰라 입술만 짓씹는다. 그러다 결국에는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다시 이름을 불러본다.

 

오이카와.”

“…눈치도 없고, 귀염성도 없고…”

오이카와?”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고, 이 정도면…”

오이카와!”

, 네엣!”

?”

 

어지간히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이와이즈미가 조금 목소리를 높이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굳어 외마디 대답을 내지른다. 그러다가 순간 정신을 차린 듯,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뒤통수를 살살 긁는다. , 이와쨩, ? 상황을 어렴풋이 파악한 오이카와가 어색하게 이와이즈미에게 묻는다. 이와이즈미는 문득 머리가 조금 아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제가 잘난 걸 너무 잘 알아서 탈이던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디로 간 거지. 어떤 인간이길래 저 오이카와가 저렇게 쩔쩔매고만 있는 거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일단은 짤막한 충고 비슷한 것을 건네 본다.

 

고백도 안 해 봤다며, 걱정하는 것도 다 네 지레짐작 아니냐? 그 재수없을 정도의 자신감은 다 어디로 간 건데.”

아니, 그러니까 걔가 좀 무슨 생각인지 짐작하기 힘든 애긴 한데, , 내가 걔한테 좀, 고의로 못되게 군 것도 여러번이고 해서…”

초등학생이냐?”

 

찔린다는 표정. 이와이즈미는 이제 정말로 머리가 아프다.

 

그럼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든지. 장렬하게 차이더라도 이렇게 혼자 끙끙대는 것 보다는 뭔가 해 보는게 낫지 않겠냐.”

하지만…”

 

무언가 반박하려다가 입을 꾸욱 다문다. 갈색 눈동자를 잠시 데굴데굴 굴리더니만,  갑자기, 마저 정리 좀 부탁할게! 하고 체육관을 나가버린다. , 잠깐, 오이카와! 당황한 목소리로 불러보아도 들리지 않는 듯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저러다가 뭐 사고라도 치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다가, 문득 뒤를 돌아 코트를 바라본다. 아프도록 꾸욱 주먹을 쥔다.

 

정리는 끝내고 가야지, 쿠소카와!”

 

으르렁거리듯 괜히 고함을 지르다가, 한숨만 푹푹 내쉬며 분을 삭힌다. 아아, 이걸 언제 다 정리한담. 하여튼 저 녀석은 도움이 되는 게 없어. 이와이즈미는 오늘도 영원히 고통받는다.

 

 

2.     스가와라 코우시의 경우

 

깔끔하게 정리된 체육관을 한 번 둘러본 다이치는 여느 때처럼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다들 꽤나 좋은 컨디션으로 연습에 임하는 와중에, 제 친구이자 부주장인 스가만 어딘지 모르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연습이 끝나자마자 오늘은 먼저 가보겠다며 멋쩍은 미소를 짓던 것이 영 걱정스럽다. 일이 있으면 털어놓기라도 하지,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 체육관 불을 끈다. 문을 잠그고 천천히 걸음을 뗀다. 금세 어둑어둑해진 청회색 하늘 아래를 느릿느릿 걷는다. 괜히 체육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익숙한 인영을 발견한다. 스가, 먼저 간다더니, 왜 또 여기에?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려다가 그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걸 보고는 멈칫한다. 어둠 속에서도 꽤나 무겁게 굳은 표정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슬쩍, 그에게 보이지 않을 만한 자리에 숨고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인다. 이건 엿듣는게 아니라 친구를 걱정하는 거라고 애써 되뇌이면서.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거 맞지?”

 

초조한 말투. 괜히 제 마음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그 말투에 다이치는 인상을 살짝 찌푸린다. 누가 뭘 시키는 것 같은데, 그럼 혹시 협박이라도 당하는 거 아니야? 협박까지는 아니더라도, 괴롭힘?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아냐, 스가와라 코우시와 괴롭힘은 영 어울리지 않지. 누군가를 괴롭히지도, 그렇다고 가만히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을 인물임을 알기에 다이치는 한 가지 가설에 붉은 가로선을 긋는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지? 뭔가 자기 힘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한게 아닌가 싶은데, 그 정도로 곤란한 일이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가야 했나 싶다. 여기 배구부만 해도 스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없네. 없구나. 뭐가 되었든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스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없다. 기껏해야 저 아니면 엔노시타? 엔노시타는 후배라 곤란할 수 있으니, 결국엔 제가 끝이다. 그럼 나한테라도 얘기하지, 하려다가 멈칫하고 만다. 나라고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저렇게 초조해할 거라면 무슨 일인지라도 귀띔해주지. 약간은 섭섭한 마음이 든다.

 

한참을 열심히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통화 상대의 이야기를 듣던 스가의 표정이 살짝 풀린다. 조금 안심이 된 다이치는 다시 입을 여는 스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열심히 듣다 보면, 친구의 고민에 대해 뭔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으니까 말이다.

 

으응, 그렇구나고백이란 거, 어렵네.”

 

사와무라 다이치, 방금 뭔가 엄청난 걸 들어 버렸다.

 

스가가 고백이라니, 연애라니! 물론 스가가 그동안 아무도 사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상대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경우였기에 스가가 먼저 누군가에게 고백을 한다는 건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제가 뭘 잘못 들었나 곰곰히 되짚어보지만, 분명히 스가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고백이 맞다. 고백이란거 어렵네. 고백, 이란거 어렵네. 고백. 고백, 고백.

 

고백?!

 

다이치는 입술까지 깨물어가며 생각에 잠긴다. 설마 죄를 고백한다는 건 아니겠고, 그렇다고 스가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보기에는 또 뭔가 아리송하다. 그동안의 스가의 모습에서 그가 누군가에게 호감을 품었다 유추해내기는 너무 어려웠다. 평소처럼 학교에 와서,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평소처럼 식사를 하고, 평소처럼 연습을 하고, 평소처럼 집에 가는 게 전부였는데, 도대체 누구를, 언제부터?

 

다이치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스가는 통화를 끝마무리짓는다. 으응, 고마워. 덕분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내 주변엔 이런 걸 잘 아는 녀석은 없으니까, 너한테 연락하길 잘했네. 으응, 잘 되면 말해줄게. 끊어. 푸스스 웃는 소리에 다이치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 이제 거기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전화하면 되는 건가?”

 

떨리네, 이거. 가만히 중얼거리며 다시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스가의 모습에 다이치는 더 이상 지켜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불러내서 고백하려는 모양인데, 계속 듣고 있으면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스가도 기분 나빠할 지 몰라. 아니, 지금 고백한다고? 지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뭉글뭉글 끓어올랐지만 다이치는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자리를 피한다.

 

나는 저 녀석이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벌써 고백까지 한다니, . 무사히 교문을 통과해 나온 다이치는 입을 다시며 가방을 고쳐 멘다. 내일 학교에서 마주치면 스가를 넌지시 떠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잘 안 됐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 먹는다. 자기가 알아서 언젠가 얘기하겠지, . 하나 둘 켜지는 가로등을 따라 걷는다. 은근히, 고백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곱씹는다.

 

 

3.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경우

 

우시지마는 오늘따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있다. 하마터면 연습에까지 차질이 생길 뻔 할 만큼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버렸으니, 스스로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것 같기도 하면서, 벽에 가로막힌 듯 갑갑하기도 하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마음에 계속 고민에 잠기다 보니, 집중력이 쉬이 흐트진다. 부원들이 걱정하는 말을 던지기에 괜찮다고 말해두기는 했지만, 괜찮기는 무슨. 괜히 텅 빈 체육관 안을 혼자 서성거린다.

 

한가득 쌓여져 정리된 공을 하나 집어든다. , , 바닥에 몇 번 튀기다가 양 손으로 가볍게 잡는다. 공을 보니 다시 아까의 연습이 떠오른다. 완벽에 가깝게 올라온 토스에조차 평소만큼의 위력으로 스파이크를 날리지 못했던 것은 왜일까. 그가 그토록 아끼는 배구에조차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니,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언젠가 마주쳤던 카라스노의 두 일학년들이 문득 머릿속을 스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세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순식간에 한가득 차오른 그 이름에 우시지마는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아까의 그 터질 것 같으면서도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유가 뭐지, 고민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생경한 감각이다. 우시지마는 공을 한번 더 세게 튀긴다. , 큰 소리를 내며 튀긴 공은 그에게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튕겨나간다.

 

타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혀 튕겨나온 공은 데구르르 구른다. 그의 발치까지 오지 못하고 멈춰버린 공을 보며 우시지마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천천히 걸어가 공을 주워든다. 두 손 안에 가득 찬 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토스가 올라오는 모습을 눈앞에 그린다. 제게 복종하는 듯한 토스, 제가 가장 완벽히 칠 수 있게 올라오는 토스그러다가 순간 세터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토스를 올린 것은 시라부도, 세미도 아니다.

 

카게야마, 토비오.”

 

검푸른 눈동자가 공 대신 저를 쫓는다. 그 강렬한 눈빛에 빠져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린다. 가슴이 빠르게 뛴다. 이상하다. 온통 알 수 없는 기류에 휩쓸려 머릿속이 어지러이 비틀거린다. 눈을 감고 집중을 되찾으려고 노력해본다. 느리게 심호흡을 하며 하나, , 하나, 두울

 

눈 앞의 암흑 사이로 푸른 빛이 스치는 것을 본 것만 같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공을 바닥에 던진다. 타앙, 타앙, , . 무거운 소리가 울리다가 이내 서서히 가볍게 사라진다. 우시지마는 그 소리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뗀다. 보랏빛 웃옷 자락이 체육관 문가를 스친다.

 

카라스노도 연습은 끝났겠지.”

 

어차피 찾아가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지만, 우시지마는 그 생각을 잡으려 애쓰지 않는다. 오늘 만나지 못하면 내일 찾아가면 되고, 내일 만나지 못하면 그 다음날 찾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금 부산하게 걸음을 옮긴다.

 

 

4.     카게야마 토비오의 경우…?

 

느릿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남색으로 물든 하늘에는 어느 새 해가 거의 다 떨어져 있다. 카게야마는 오늘의 연습을 다시 떠올려 본다. 스가와라상, 역시 오늘 연습에 집중 못 하고 있었지? 배구에 한해서라면 누구보다 빠른 눈치와 매서운 관심을 가진 그에게, 스가가 집중을 잃었던 것은 너무나도 빤히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신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한다. 그러고는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베어무는데, 순간 표정이 싸악 굳어진다. 익숙한 인영이 가로등 밑에 서 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오이카와상?”

 

뚱한 표정으로 묻는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하하, 토비오쨩, 잘 지냈어? 잘 지냈긴 했는데요, 무슨 일이세요? ,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한참을 눈만 굴리며 입을 열지 못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카게야마는 오늘따라 그가 많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왜 말을 안 하시지? 입을 삐죽거리는 습관이 다시금 튀어나온다. 한참을 그렇게 정적에 싸인 채로 서 있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린다. 조금 먹먹한 것이 아무래도 가방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오이카와를 앞에 두고 카게야마는 가방을 뒤진다.

 

, 스가와라상.”

 

오늘 유독 집중하지 못하던 스가를 떠올리며 카게야마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하는 소리에 오이카와가 눈을 부릅뜬다. 카게야마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지금 그 만두 가게 지나서 올라가는 골목길인데요, , . 어딘지 알아요. 거기로 지금 가면 되는 건가요?

 

카게야마의 마지막 말이 채 수화기를 타고 전해지기도 전에 오이카와가 전화기를 뺏어 든다. 오이카와상! 카게야마가 소리를 지르지만 오이카와는 못 들은 척 태연하게 전화를 받는다. 아니, 태연하게는 아니지. 불안한 모습을 애써 숨기며 그가 입을 연다. 여보세요, 상쾌군? , 오이카와상인데.

 

토비오쨩, 지금 나랑 있거든. 상쾌군한테 가기 좀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무슨 소리세요, 오이카와상!”

 

황당해하는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는 휴대폰을 들지 않은 쪽 손을 가볍게 흔든다. 마치 다 괜찮다는 듯이. 제가 안 괜찮은데요, 하고 맞받아칠까 잠시 생각한 카게야마는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저 고집쟁이 오이카와상을 누가 말려.

 

수화기 너머의 스가가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이카와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진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간 채였지만, 입이 웃는다고 얼굴이 웃는 건 아니다. 분을 참는 듯 기묘한 표정을 한 오이카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참지 못하고 수화기에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래, 어디 맘대로 해봐 상쾌군! 씨익거리며 표정을 일그러뜨린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휴대폰을 돌려준다.

 

저 이제 가봐도 되나요? 스가와라상이 불렀는데.”

아니, 상쾌군이 여기로 오시겠대.”

 

역시 상쾌군, 전혀 상쾌하지 않아. 팔짱까지 끼고 허공에 중얼대던 오이카와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카게야마를 돌아본다. 토비오쨩, 사실 내가 할 말이 있었는데 말이야묘하게 분위기를 잡는 모습에 카게야마가 조금 움찔한다. 오늘따라 갑자기 왜 이러시지?

 

카게야마!”

 

그 미묘한 분위기를 깨버린 것은 스가의 목소리다. 오래 기다렸지? 묻는 말과는 달리 시간은 놀랍도록 조금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녜요, 빨리 오셨네요. 하하, 그런가? 꽤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이미 오이카와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듯 하다. 오이카와는 조금 짜증이 나 큰 소리로 카게야마를 부른다. 토비오쨩! , 아직 계셨어요? 아직 계셨어요, 라니 너무하잖아!

 

하여튼, 내가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토비오쨩.”

, . 그 할 말이라는 게…”

나도 할 말이 있어, 카게야마.”

 

카게야마의 말을 자르고 스가가 조금 다급히 입을 뗀다. 그러고는 카게야마의 양 손을 제 양 손으로 각각 붙잡아 아예 자기 쪽으로 몸을 틀게 만든다. , 스가와라상? 당황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카게야마에게 스가는 진중히 입을 연다. 카게야마,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카게야마.”

 

스가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든다.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우시지마가 카게야마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 있다. 그는 가만히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걸음을 떼 다가온다. 카게야마를 잡은 스가의 손이 천천히 풀린다. 너무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인지, 세 사람 모두 굳게 얼어붙어 있다. 우시지마가 카게야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말할 것이 있어서 왔다. 자꾸 네 생각이 나더군. 가슴도 이상하게 자꾸 울렁거렸다. 처음엔 네 배구를 떠올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곧은 시선은 여전히 카게야마에게 고정되어 있다. 검푸른 빛을 바라보며 우시지마가 마지막 말을 던진다.

 

나는,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된 듯이, 세 사람이 동시에 정신을 차린다.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오이카와다.

 

우시와카쨩, 미안한데 토비오쨩은 내 거거든?”

“? 나는 카게야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적은 없다만.”

몰라, 기분 나쁘니까 생각도 하지 마! 짜증나!”

제가 왜 오이카와상 건데요!”

 

오이카와와 우시지마, 카게야마가 복작거리며 이 말 저 말을 주고받자, 스가는 다급해진 마음에 카게야마의 팔을 붙들고는 입을 뗀다.

 

둘 다 미안하지만, 카게야마는 오늘부터 내 거거든요.”

 

그러고는 카게야마의 몸을 다시 돌려 제게로 향하게 한다. 두 눈이 마주치자 스가가 다시 입을 뗀다.

 

좋아해, 카게야마. 나랑 사귀자.”

무슨 소리야, 상쾌군!”

 

혼비백산한 오이카와가 스가와 카게야마를 떼어놓는다.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토비오쨩은 내 거라니까? 오이카와, 네가 카게야마를 소유한다고 말할 자격이 어디서 생기는지 궁금하다만. 맞아요, 카게야마가 왜 당신 겁니까? 그 쪽도 마찬가지다. 맞아, 상쾌군! 차라리 상쾌군보다는 나지! 그건 아니다, 오이카와. 그나마 내가 제일 적합할 것 같은데. 너무 무리수를 두시는데요, 국가대표면 답니까?

 

어지럽게 쏟아지는 말들 사이에 갇힌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그만하세요, 다들!”

 

큰 소리로 울리는 목소리에 세 사람이 뚝 말을 멈춘다. 카게야마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세 쌍의 눈동자를 번갈아가며 응시하고는 쏘아붙인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다들 제가 자기 거라고 말하는 거죠?

 

싸늘한 말투에 세 사람이 흠칫 굳어진다. 저 푸른 눈동자에 저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 담길 수도 있었나, 싶은 마음에 서로를 흘깃거리다가, 이어지는 말에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전 제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그럼 이만. 그 와중에도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로 돌아 총총 사라져버리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세 사람이 벙찐 표정으로 바라본다.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버린 뒤에도 한참을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는, 마침내 서로를 바라보고 한 마디씩 뱉는다. 망했네요. , 망했네. 큰일 났군.

 

카게야마!”

토비오쨩!”

 

뒤늦게 그를 부르는 세 사람의 목소리가, 이미 떠나버린 그의 귀에 들릴 리가 있을까. 가로등 불빛에 비친 세 그림자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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