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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HQ

[오이카게] 죽음 없는 유언을 위하여



*오이카게 전력 27회 주제 '유언'으로 참여했습니다




오이카와 토오루x카게야마 토비오

죽음 없는 유언을 위하여




가끔 나는 차라리 우리가 만난 적이 없기를 바란다. 아키야마 초등학교 출신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어린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던 순간을 되감고 또 되감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내 눈 앞의 네가 그제야 다시 초점 안으로 들어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이카와상? 묻는 말은 아무런 감정이 묻지 않은 것처럼 희어서 아찔하다. 나는 별 것 아니라고 웅얼대듯 대꾸하고는 애써 밝은 얼굴을 뒤집어쓴다. 있잖아, 토비오. 몇 번이나 입을 열려 시도해 보아도 잘 되지 않는다. 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네게 억지 웃음을 되돌려준다. 그러면 너는 또 예의 그 희지만 투명하지 못한 감정, 아니 감정이 아닌 것을 내보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 네 모습에 나는 순간 너의 마음도 나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기대하고는, 죄책감에 입꼬리를 더 끌어올린다.

 

이미 나의 사랑은 유언도 없이 죽어버린 것을 알기에.

 

언제부터인지는 기억할 수 없다. 나는 너를 보며 더 이상 이전의 설렘도 기쁨도 행복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단순한 권태가 아님을 내심 알고 있었다. 사랑은 낌새도 없이 서서히 죽어갔고 나는 그것을 모른 체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했다. 남은 답은 단 하나였다. 나는 뻔히 그 끝을 알면서도 생각을 이어나갔고 마침내 다다른 결론에서 홀로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었다. 한때 뜨거운 가슴으로 알았고 느꼈고 생각하고 기억했던 네 앞에서 돌아설 때가 되었다는 데까지 걸음이 다다랐을 때 나는 막다른 골목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파서가 아니라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명치께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의 이름은 두려움이었다.

 

너와 연애를 시작한 것은 7년 전,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였다. 그때의 나는 불꽃 같은 열정에 휩싸여 네게 반쯤 충동적인 고백을 했고 네 반응은 상상한 것과는 정반대로 놀랍도록 건조했다. 저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이카와상. 당황이 묻었지만 동시에 덤덤하기 그지 없는 말투에 나는 심장이 조여들어 온통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거절인가, 토비오? 쓰게 웃으며 예상한 결과에 순응하려던 순간 너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요, 오이카와상.

 

제게 그게 뭔지, 가르쳐주세요.”

 

가르쳐달라는 말, 네게 수십, 수백 번을 들었던 그 말을 이런 식으로 듣게 되니 묘했다. 나는 믿어지지 않는 마음에 잠시 멍하게 네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물들이듯 웃음을 얼굴 전체에 꽃피웠다. 기쁜 마음을 차마 주체할 수 없어 너를 끌어안았던 것 같기도 하다. 벌써 희미해져가는 그 날의 기억에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또 웃음을 짓는다. 내가 멋대로 고백했던 순간을 내가 잊는 것은 아무래도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미 잊혀져 가는 것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미 죽어버린 이가 되돌아올 수 없듯이, 이미 죽어버린 마음이 다시 되살아날 수 없듯이. 네게 보이지 않게 입술을 짓씹는다.

 

너를 사랑하며 보낸 지난 7년간은 내게 다시 없을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는 네 소소한 모든 것에 행복했고 너도 그랬으리라 믿는다. 간혹 다투기도, 서로 원망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너를 미워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도 없었다. 나는 쉬지 않고 사랑을 했고 결국 내 사랑은 그 쉼 없음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어쩌면 예정된 수명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이 유효기간을 다해 스러져 버린 것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네게 입을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고 너를 품에 끌어안는 것이 벅차지 않았다. 어디에서 그것이 죽어버린 것인지 선을 그어낼 수는 없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선언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최소한 내게는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그렇다면 토비오, 너는 어떨까. 너는 내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했다. 나는 네게 아낌없이 사랑을 퍼부어주는 것으로 가르침을 대신했다. 네가 나를 뜨겁게 사랑했는지, 나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언제부턴가 내가 네게 사랑을 부어주기만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사랑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너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록 더욱 그 믿음에 확신을 더했다. 서툴지만 분명히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너의 말에서, 너의 손짓에서, 너의 눈빛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내게 사랑을 가르쳐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가르쳐 줄 때까지 묻는 네가 내게 묻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해석했고 그 해석이 맞아떨어진다는 것은 네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알 수 있다. 너는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다. 여전히 조금 어색하고 비틀거릴 지 몰라도 너는 분명히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나는 그래서 네게 이별을 고할 수 없다. 한 때 조금은 미워했을지도 모르지만 한때 분명히 깊게 마음에 품었던 네게 차마 냉정히 헤어짐을 말할 수 없다. 잔인하게도 나는 그래서 네 사랑이 빠르게 식기를 원했고 내가 네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겁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비겁하고, 추잡하다. 나는 너를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내 옆에 잡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을 부수어 옛날의 추억이라 칭하며 던져 버리고 싶었다. 단지 네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에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에. 괴로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네게는 아무것도 티를 낼 수 없다.

 

오이카와상.”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목소리로 내 이름이 불리워진다. 나는 네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고개만 끄덕이고는 괜히 앞에 놓인 음료를 홀짝인다. 여름날의 카페는 더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로 그득해 시끌시끌하다. 나는 그 소음에 내 마음의 고뇌가 묻혀 버리기를 간절히 바라며 컵을 입에서 뗀다.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문득 이유 없이 불안해져 재차 컵을 입에 댄다. 카페 안을 가득 채운 소리가 잡음이 되어 멀어진다. 다시 열리는 너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만이 내 신경을 자극한다.

 

헤어져요.”

 

덜컥, 마음이 내려앉는다. 나는 그것이 놀람이나 당황보다도 안도감이라는 데에 놀라지 않는다. 네가 내게 먼저 이별을 고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방금 네게서 토해내진 말이 헤어짐의 선고라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본능이나 반사 작용에 가까운 안도였다. 나는 내가 네게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는 데에 안심했고 그 안도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데에 잠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결국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모든 감정들을 집어삼킨다. 나는 네게 형식적으로나마 이유를 물으려다 멈칫한다. , 정말 왜?

 

왜 네가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나는 네가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고, 너도 아마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다. 우리가 함께한 그 7년의 시간동안 너는 나에 대해 그만큼의 인식은 가지게 되었으므로. 그렇다면 왜?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아아, 그런 네가 내가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둔하고 뭉툭하던 네 안테나를 내게만 높이 곧추세워 놓은 장본인이면서도 나는 채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하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식으로도 네게 상처를 주는 인간이고 싶지 않았기에, 스스로에게 무의식적으로 네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을 하자 나는 척추를 타고 오르는 기묘한 감정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너를 기만했다. 네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너는 그에 대한 응대로 이별을 선고하고 있는 것이다. 우습게도 네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나를 너는 여전히 사랑하고 그래서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아직 끝을 맺지 못한, 종말을 보지 않은 사랑에 강제로 마침표를 찍으려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너에 대한 죄책감에 눈을 느릿하게 깜박인다. 암흑 한 번, 네 얼굴 한 번, 또 다시 짙은 어둠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푸른 눈동자 한 번. 나는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이 여전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죽지 않은 사랑의 유언을 미리 작성해 내게 보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유언 없이 죽은 내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내 앞에 내어놓아진, 죽음 없는 유언을 바라본다. 아무런 감정 없이 희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너의 마음이 사실은 시꺼멓게 물들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챈다.

 

그리고 나는 입을 연다.

 

그래.”

 

죽지 않은 사랑의 유언을 받아 든 것은 죽은 사랑의 흔적이다.

 

이유를 묻지 않는 내게 너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담담한 척 컵을 쥐는 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파란 눈 안쪽에서 슬픔이 흐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남이 될 것이고 나는 네게 상처를 주지 않은 사람으로 포장되어 남을 것이다. 아직 살아 숨을 쉬는 너의 사랑에 바치는 마지막 경례처럼 나는 일어나 네게 손을 뻗는다. 너는 앉은 채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쥔다.

 

고마웠어.”

 

그리고 고마워. 덧붙이는 말은 목 뒤로 삼키며 잡은 손을 흔들어 악수를 한다. 이내 잡은 손을 놓고 네게 인사를 한다. 안녕. 안녕히 가세요. 소음 속에 인사가 묻히듯 희미해진다. 너를 등 뒤에 두고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나는 여름의 더위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죽은 사랑과 죽지 않은 사랑이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