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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HP

[시리무] 암흑과 빛과 살해에 대하여 암흑과 빛과 살해에 대하여 그의 생은 암흑에서 비롯되었다. 깜박이는 촛불 아래서 한밤중에 느닷없이 세상으로 나온 아이는 제 생과 어미의 생을 맞바꾸었다. 아이의 눈이 처음 본 세상은 눈부신 빛 대신 침침한 어둠이었고 마음이 처음 접한 것은 삶이라기보다 죽음이었다. 일곱 살 차이의 손윗누이가 죽은 어미와 무능한 아비의 역할을 모두 맡았다. 누이의 등에 업혀 걸음마보다 구걸을 먼저 배운 아이는 연약한 몸으로 위험 속에 그대로 노출되어 생의 위기를 수없이 겪었으나 기적처럼 생존했다. 너는 나의 기적이자 빛이야, 속삭이는 누이의 목소리에 의문을 품게 될 무렵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어두컴컴한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빛이란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으므로 소년은 누이의 말에 자주 혼란을 느꼈다. 감히 제가 기적이.. 더보기
조각글 백업 [리들레귤] “귀여운 아이야, 나와 함께 놀아주지 않으련?” 비 오는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은 레귤러스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은, 한 눈에 보아도 그 또래의 소년이었다. 그런 모습을 하고서 흡사 제가 훨씬 나이가 많은 것 마냥 말을 건네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레귤러스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웃기 이전에 그는 울고 있었고, 마음 깊은 곳에 박힌 아릿한 슬픔을 홀로 끅끅대며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문을 버린 제 형에게만 매달리는 부모 아래서, 차남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제가 서럽고 비참했다. 그런 저는 웃을 수 없었다. 지금도 웃을 수 없고, 이전에도 웃을 수 없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웃을 수 없을 것이다. 레귤러스는 제 눈물이 빗줄기에 휩쓸려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를 간.. 더보기
[시리무] Black flower *6학년 무렵의 이야기. 하나하키 병(짝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꽃을 토하는 병)에 걸린 리무스. 시리우스 블랙x리무스 루핀Black Flower 느슨하게 묶은 새카만 머리칼이 연녹색 눈동자 안에서 휘날리며 춤을 춘다. 너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다. 은회색 눈동자가 네 눈 앞에 어른거리다 잦아들곤 재차 나타난다. 너는 또 한 번 눈을 깜박인다. 오뚝 선 날렵한 코가 스치듯 사라지고, 미소가 감도는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또 눈을 깜박인다. 지팡이를 장난스레 손 안에서 휘휘 돌리던 모습이 어느 새 너를 빤히 바라보는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어디 아파, 무니? 투박한 다정함이 담긴 말에 너는 토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간신히 고개를 저은 너는 애처롭게 제임스를 바라본다. 고.. 더보기
[시리무/레리무] 무제 *커플링의 탈을 쓴 블랙 형제 얘기하는 글*네이비(@hqultramarine2)과 푼 썰의 일부를 글로 풀었습니다. 사랑해요 네이비님♡♥♡♥ “설명해 봐, 리무스 루핀.” 어떻게 된 거야? 저를 복도로 끌고 나와서는 으르렁대듯 묻는 시리우스의 모습에 리무스는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다는 거야? 한숨처럼 뱉는 반문에 짜증이 난 기색이 여실했다.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은 그 감정을 읽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지만, 시리우스는 사납게 입가를 비죽였다. 금방이라도 이를 세우고 달려들 것만 같은 표정은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은회색 눈동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재미있는 광경이라고, 레귤러스 블랙은 생각했다. “네가 왜 저런, 저런 녀석이랑 같이 있는 건데.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리무스의 .. 더보기
[제레귤] Dejavu [제레귤] Dejavu 동물원에 갔다. 딱히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는 형식적인 봄 소풍에 휩쓸리듯 가게 된 동물원은 작고 낡은 곳이었다. 십대 후반의 고등학생들에게 동물원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싸구려인 것이 티나는 곳이라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꽤나 오랜만인 것은 사실이었다. 동물원 안쪽에선 자유롭게 다녀도 좋다는 말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흩어지는 아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던 나는, 기왕 온 김에 조금 둘러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어 천천히 걸음을 뗐다. 어차피 내 발로 걸어들어올 일은 없는 곳이니. 초라한 갈기를 가진 수사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맹수 우리와, 그다지 크지도 않은 뱀 몇 마리가 전부인 파충류관, 흔히 볼 수 있는 토끼 같은 동물들이 등을 돌리고 옹기종기 .. 더보기
[시리무] 무제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깊은 심해와 같이 우울하고 비극적인 인생들을 담담하게, 건조하게, 메마르게, 써내려가는. 열 세 살 때부터 밤마다 제 팔뚝에 핏빛 흉터를 내오던 이의 인생도, 지독한 자기 혐오에 미쳐 제 안에 갇혀버린 이의 인생도, 손을 벌벌 떨며 저를 사랑해 줄 사람을 갈구하던 이의 인생도. 한 치의 조급함도, 한 치의 연민도, 한 치의 미련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철저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감정의 개입은 조금도 없는 그 글을 누군가는 아름답다 했고, 누군가는 잔인하다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스스로의 글에 아름답다는 말도, 잔인하다는 말도 붙이지 않았다. 그건, 그냥, 글입니다. 딱딱히 끊어지는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리무스 루핀은 이 인터뷰가 쉽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