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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HP

조각글 백업



[리들레귤]

 


귀여운 아이야, 나와 함께 놀아주지 않으련?”

 

비 오는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은 레귤러스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은, 한 눈에 보아도 그 또래의 소년이었다. 그런 모습을 하고서 흡사 제가 훨씬 나이가 많은 것 마냥 말을 건네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레귤러스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웃기 이전에 그는 울고 있었고, 마음 깊은 곳에 박힌 아릿한 슬픔을 홀로 끅끅대며 토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문을 버린 제 형에게만 매달리는 부모 아래서, 차남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는 제가 서럽고 비참했다. 그런 저는 웃을 수 없었다. 지금도 웃을 수 없고, 이전에도 웃을 수 없었으며, 아마 앞으로도 웃을 수 없을 것이다. 레귤러스는 제 눈물이 빗줄기에 휩쓸려 상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왜 우니, 아이야?”

 

안타깝게도 레귤러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묻는 말에서는 걱정스런 다정함이 묻어났다. 레귤러스는 그 상냥함에 울컥한 나머지 잇새로 흐느끼는 소리가 새는 것을 느꼈다. 다급히 입술을 깨물고 입을 틀어 막으려는데, 소년이 손을 뻗어 레귤러스를 저지했다. 억세지만 조심스런 손짓으로 손목을 붙들고는, 다른 쪽 손으로는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면 안 되지, 예쁜 입술 다 상해. 다정히 하는 말에 레귤러스는 차마 소년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면 더 눈물이 나 버릴 것 같았기에. 대신에 레귤러스는 제 손목을 붙잡은 소년의 손을 바투 붙잡아 매달렸다. 저기, 있잖아요.

 

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되나요?”

 

흐느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에 소년도 연민을 느낀 듯 혀를 한 번 츳, 찼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레귤러스를 제 품에 가득 담고는 등에 손을 얹어 도닥였다. 울지 마렴, 중얼거리는 소리에 레귤러스는 소년의 어깨에 둘러진 검은 망토에 얼굴을 묻었다. 저를 위로하는 말을 귓가에 속삭이는 소년의 두 눈동자가 어느덧 새빨간 붉은색으로 변해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불쌍한 아이야, 내 예쁜 아이. 보듬듯 중얼이는 입은 어느새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릴] 할로윈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이야, 포터?”

 

할로윈 깜짝 선물인지 뭔지를 운운하며 인적 드문 곳으로 릴리를 불러내어 놓고는 정작 그 자신은 자리에 없다. 어이가 없어진 릴리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감히 포터가 제게 허무맹랑한 장난을 쳤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얼른 나와, 포터. 대강 앞의 풀숲 쪽을 향해 소리를 쳐 보지만 인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츳츳, 혀를 가볍게 찬 릴리는 그냥 자리를 떠 버릴까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전에도 자주 했지만, 이 정도로 알 수 없다고 여겼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던 릴리는 이내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포터?”

 

묻는 말에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릴리는 조금 짜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런 릴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풀숲을 헤치고 제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은 한 마리의 수사슴이었다. 높게 솟은 뿔과 반질반질한 고동색 털, 윤이 나는 검은 코와 반짝이는 눈동자에 쭉 뻗은 다리까지, 어디 하나 못난 구석이 없는 놈이었다. 전혀 예상 외의 것이 등장하자 릴리는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몸을 움츠렸다. 녀석은 그런 릴리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머리를 숙여 릴리의 앞에 댄 녀석에게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알 수 없어 손만 꿈질거렸다. 만져 달라는 건가? 고민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사슴의 윤기 나는 털에 대었다. 가만히 쓸어내리는 손길이 좋다는 듯 사슴은 눈을 감았고, 릴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속 그것의 목이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너는, 누구니?”

 

온순한 사슴의 태도에 릴리는 살풋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 되게 순하다.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릴리에게 사슴은 눈만 깜박여 보였다. 릴리는 그 모습이 제법 우스우면서도 사랑스러워 보여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사슴의 콧잔등을 쓰다듬어 준 릴리는 그것의 목을 가볍게 감싸안았다. 따뜻해서 좋다. 옷자락에 나뭇잎이 묻는 것도 모르고 릴리는 계속 그렇게 사슴을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사슴의 정체가 할로윈 특집으로 변장이 아닌 변신을 한 제임스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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