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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HP

[제레귤] Dejavu



[제레귤] Dejavu 

 

 



   동물원에 갔다.


 

   딱히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가는 형식적인 봄 소풍에 휩쓸리듯 가게 된 동물원은 작고 낡은 곳이었다. 십대 후반의 고등학생들에게 동물원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싸구려인 것이 티나는 곳이라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꽤나 오랜만인 것은 사실이었다. 동물원 안쪽에선 자유롭게 다녀도 좋다는 말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흩어지는 아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던 나는, 기왕 온 김에 조금 둘러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어 천천히 걸음을 뗐다. 어차피 내 발로 걸어들어올 일은 없는 곳이니.


 

   초라한 갈기를 가진 수사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맹수 우리와, 그다지 크지도 않은 뱀 몇 마리가 전부인 파충류관, 흔히 볼 수 있는 토끼 같은 동물들이 등을 돌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설치류 울타리, 맥빠진 미소를 지으며 피곤한 손짓으로 풍선을 건네는 기념품점의 여자, 무표정한 얼굴로 터무니없이 작은 솜사탕을 만들고 있는 스낵 코너의 남자......아이들에게 호기심과 설렘을 안겨주어야 할 장소가 이런 분위기여도 되는 건지.  이렇게 기운 빠지는 장소라면, 꿈과 희망은 어림도 없겠는걸. 문득 몰려오는 피곤함을 털어내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렇게 대강 이곳저곳 둘러보다,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초식동물 우리였다. 지친 눈빛으로 몇 개 달려 있지도 않은 나무 이파리를 괜히 씹고 있는 기린 한 마리와, 다 말라가는 물웅덩이 안에 멍하게 서 간혹 코로 등에 물을 끼얹는 코끼리, 거기에 저들이 바라보고 있는 동물들 만큼이나 넋이 나가 보이는 관람객들까지. 지켜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묘하게 가라앉히는 그 광경을 뒤로 하고, 어디 앉을 곳이나 찾아보려던 찰나에, 나는 이 음침한 풍경과 너무나도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당당하고, 웅장하고, 기운 넘치게 서 있는 수사슴 한 마리. 초라한 가짜 바위 절벽 위에 서 있어도 흐려지지 않는 위용에, 나는 잠시 멍하게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길게 뻗은 탄탄한 다리와, 조금 까슬해 보이지만 깨끗한 털로 덮인 몸, 멋지게 위로 솟은 두 뿔, 그리고, 나를 향해 고정된 그 시선. 마치 내가 누구인 지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렇게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새카만 두 눈동자를, 나는 홀린 듯 응시했다. 어두운 숲의 암흑이, 가장 깊은 밤의 풍경이 담긴 듯한, 그런, 눈동자.

 


   멋지죠?”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마법에 걸린 듯,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 이상하게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색으로 동물원 마크가 찍힌 황토색 작업복 같은 것을 입은 훤칠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육사인가, 생각하며 잠시 남자를 살폈다. 구불구불, 이리저리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과, 둥그런 안경 너머의 반짝이는 고동색 눈동자, 장난스레 한 쪽만 올라간 입꼬리, 마르고 호리호리한 몸 선,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의 잔근육 진 팔뚝까지, 생기 없는 주변의 풍경과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의 남자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가슴에 스치듯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 이유를 알 수 없는 감각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편다. 정말 어디선가 만났던 것만 같은 기묘한 익숙함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아련함이 덧씌워졌다. 바람에 잔잔히 흩날리던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눈물 젖은 고동색 눈동자가, 무언가 처절하게 내뱉는 입술이, 눈 앞의 남자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환상은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 묻고 말았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급작스런 질문에 남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기억을 되짚는 듯 입을 꾸욱 다물고 팔짱을 낀 남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자가 이내 다시 내게로 눈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긴장되는 마음에 보이지 않게 주먹을 한 번 꼭 쥐었다가 폈다. 축축히 땀이 배어나오는 것도 같았다.

 


, 초면, 같은데요.”

 


남자는 대답을 내고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었다. 검은 머리칼이 더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 기대했는지, 허탈함이 마음을 울렸다. 나조차도 명확히 기억하지 못했으면서, 단지 순간의 느낌 때문에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에 도대체 무슨 기대를 한 것인지.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다급히 변명의 말을 꺼냈다.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죄송해요.”

하하, 아니에요. 프롱스한테 홀리셔서 정신이 없으셨나보다.”

 


프롱스? 모르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나를 보고서는 남자가 덧붙였다. 저 녀석, 저 사슴 이름이 프롱스예요. 아까부터 계속 보고 계시던데. 그제야 아아, 하며 고개를 돌려 다시 사슴을 한 번 흘긋한다. 확실히 이 동물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녀석임은 틀림없다. 혼자 저렇게 위풍당당하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입을 뗴었다.

 


저도 몰라요, 왜 저렇게 늘 고고하게 있는지.”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눈을 크게 뜬 나를 보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뭐 많이들 궁금해하시더라구요. 그러고선 그 사슴, 프롱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남자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남자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가에 잔잔하지만 강직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런 점이, 참 멋진 것 같아요. 주변이 어떻든지 간에, 본인의 소신을 지키는 모습, 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냥, 분위기에 굴하지 않는 모습이 되게 멋지더라구요, 저는. 제가 또 애정을 많이 갖고 있는 녀석이다 보니까, 저런 모습은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내 신념은 버리지 말아야겠다는, 그런 다짐을 하게 만드는 녀석이에요.”

 


, 너무 확대 해석이 아닌가 싶지만, 매일 보는 게 동물들뿐이다 보니 별 생각을 다 하게 되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다시 장난스런 모습을 되찾았다. 눈을 접어가며 장난스레 웃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보는 남자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실이 아득히 멀어져가고, 다시 남자의 얼굴 위에 환상이 덧그려졌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킬 거야, 그렇게 한 마디 말을 남기고는 또다시 사라져버린 환상에 나는 조금 눈물이 나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왜 그렇게, 왜 그렇게 아프다는 얼굴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왜 그렇게 힘겨움을 두 눈 가득 담고 있었는지. 이유도, 근원도 알 수 없는 환상이었지만, 그 여운은 너무 컸다. 애써 다시 주먹을 꾸욱 쥐며 현실을 붙잡았다. 표정에 심란함이 드러난 모양인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남자에게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멋지네요, 그런 마음.”


그제야 남자는 소리를 내어 하하 웃고는, 이해해주시니 기쁘다며 능청을 떨었다. 그러다가 이것도 인연이라며,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하고 묻는 남자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붙임성 한번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나는 문득, 내 입가의 웃음이 더 이상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레귤러스 블랙, 입니다.”

제임스 포터예요.”

 


이름을 밝히고는 아예 손까지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남자를 보며, 나는 기어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무려면 어떻냐는 마음으로 손을 맞잡고 살짝 흔들었다. 마주 잡은 손이 따스했다. 또 마음 어딘가에서 작은 욱신거림이 일었지만, 그 위를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감싸 덮어버리는 듯 했다. 포근한 가슴만큼 아늑한 온기를 안은 바람이 뒷목을 잔잔히 어루만졌다.

 


사슴이 여전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다는 것을, 나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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