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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

[시리무] 암흑과 빛과 살해에 대하여 암흑과 빛과 살해에 대하여 그의 생은 암흑에서 비롯되었다. 깜박이는 촛불 아래서 한밤중에 느닷없이 세상으로 나온 아이는 제 생과 어미의 생을 맞바꾸었다. 아이의 눈이 처음 본 세상은 눈부신 빛 대신 침침한 어둠이었고 마음이 처음 접한 것은 삶이라기보다 죽음이었다. 일곱 살 차이의 손윗누이가 죽은 어미와 무능한 아비의 역할을 모두 맡았다. 누이의 등에 업혀 걸음마보다 구걸을 먼저 배운 아이는 연약한 몸으로 위험 속에 그대로 노출되어 생의 위기를 수없이 겪었으나 기적처럼 생존했다. 너는 나의 기적이자 빛이야, 속삭이는 누이의 목소리에 의문을 품게 될 무렵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어두컴컴한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빛이란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으므로 소년은 누이의 말에 자주 혼란을 느꼈다. 감히 제가 기적이.. 더보기
[커크술루] 19시 27분의 사막 *커크술루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꿈을 꾸었다. 꿈은 아득한 사막에서 피어올랐다. 눈이 부신 태양 아래로 더위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열기가 연기마냥 솟아올랐다. 자칫하면 눈에 보일 것만 같은 선명한 더위에 나는 걸음을 옮기다가도 발목을 붙잡혔고 비정상적으로 두근대는 심장은 박살날 듯 움켜쥐어졌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구원을 찾는 마음만이 달음박질했다. 죽는 거다, 이 사막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는 거다. 되뇌이던 말은 이내 잘게 부수어져 모래처럼 입 안에서 바스락대었다. 온통 갈라지고 튼 입술이 비죽 튀어나와 물을 찾았다. 목이 탔다. 정말 말 그대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시퍼런 불꽃이 기도를 턱 막았다가 끈적하게 흘러내려 마침내 속을 뒤집고 태우고는 새카만 재로 만들어버리는 것.. 더보기
[벤술루] 싫은 사람 히카루는 벤이 싫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다 보면 그냥, 이유 없이 좀 별로인 사람 한 사람 정도야 있지 않은가. 히카루에게는 벤이 그런 사람이었다. 첫 만남부터 왠지 묘하게 짜증이 났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도, 다부진 체격도, 특유의 다정한 말투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히카루는 벤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도 웃음기 없이 건조한 반응만을 보일 따름이었고, 간혹 실수로 몸이라도 부딪히면 하루 종일 뚱한 표정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티를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사실 벤도 히카루가 싫었다. 여유 없이 끝까지 단추가 채워진 사립학교 교복 셔츠라든가, 영 딱딱해 보이는 까만 뿔테안경, 혹은 성격이 드러나는 반들반들한 구두 같은 것들이 그다지 좋아 보.. 더보기
단문 모음 칸체콥 사내는 소년의 어눌한 발음을 사랑했다. 뭉개지면서도 톡톡 튀어오르는 것 같은 독특한 발음과 억양은 이상하게 늘 사내를 들뜨게 했다. 그가 소년이 약을 먹어야 한다고 조잘댄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도 같은 선상에 있는 일이었다. 소년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은 흰 알약을 집어든 그는 소년에게 입을 벌릴 것을 종용했다. 느릿하게 말을 따르는 소년의 눈에서는 당혹감이 비쳤다.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보이는 고른 치아와 분홍빛 혀에 사내는 기이한 떨림을 느꼈다. 조금 더, 사내의 종용은 속삭임과 같았다. 소년은 조심스레 입을 더 벌렸고 사내는 그것에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 착하지. 사내는 손을 뻗어 알약을 소년의 혀에 얹었다. 소년은 쓴 맛이 입 안에 퍼지자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보다도 더 어눌.. 더보기
[커크술루] 사랑에 대하여 진단메이커: 그저 꿈일 뿐인/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당신은 왜 나만 두고 갔나요? 당신은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당신의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는 지금이 일곱 시 반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러면 졸린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켜 창문 앞에 가서 섰다. 당신을 닮아 유려한 선의 새카만 차가 차고를 빠져나가 느릿하게 달리기 시작하는 모양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차의 뒤꽁무니가 점점 지붕들 사이에 가려지고는 했다. 나는 그제야 기지개를 켜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면 나는 종종 늦장을 부렸고 당신의 차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근처 공원의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웠다. 아이들이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나는 홀로 그네에 앉아 다리를 모래밭에 늘어트렸다. 신발 속으로 .. 더보기
[본즈술루] 너의 조각들 *사망소재(자살) 주의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문득문득 마음을 채우는 생각의 시작은 뚝뚝 떨어지는 새카만 수채 물감 같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으나 순식간에 마음을 짙은 색으로 물들였다는 점에서 그랬다. 나는 온통 젖어들어 축축하고 지저분해진 마음을 빨아 다시 희게 만드는 대신에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기로 했다. 일종의 상복이었다. 동시에 너를 죽게 두었던 나에게 내리는 하나의 형벌이기도 했다. 너를 살리지 못했던 내가 속죄의 의미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매일을 너를 추모하고 나를 벌하며 살기로 했다. 나답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이상하지는 않았다. 너는 나를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던 사람이었으므로. 우스운 것은 내가 너를 제대로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너를 .. 더보기
[커크술루] 궤도이탈 上 *학교 폭력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는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고 그 사실은 그를 종종 죽고 싶게 했다. 비참함보다 권태가 더 큰 이유였다. 비틀린 약육강식의 세계는 그에게 아무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온갖 시비와 시기에 둘러싸여서도 그는 위기의식이랄 것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다만 이런저런 불합리함을 법칙 삼아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에 환멸 비슷한 것을 가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탈을 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아등바등 살아가는 번잡한 세계 위로 씌여진 평이함의 덮개는 홀로 뚫고 올라가기에는 너무 두텁고 무거웠다. 혹시 누군가 같이 그 희뿌연 막에 구멍을 내 줄 수 있다면, 하다못해 함께 시도라도 해 줄 수 있다면. 드러내놓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의식의 저편에.. 더보기
[커크술루] LOST *벤과 데모라를 잃은 술루, 그를 사랑하는 커크.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일들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더없이 맑은 색채만이 더해질 것 같던 인생의 길에 느닷없이 새카만 페인트가 뿌려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말이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하나의 작은 사고의 형태로 찾아왔다. 어느 부주의한 운전자의 실수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뗀 발걸음이 한 남자와 한 아이의 죽음을 낳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가족의 부고를 전해들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뒤늦게 터져 나온 울음은 오열이 되지 못하고 삼켜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가슴을 갈라놓았지만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망함으로 채워진 마음은 존재 자체로 모순이었다. 그러다가 외로움과 절망과 고통이 나를 덮쳐오면 나는 어미를 잃은 새.. 더보기
[커크술루] SPONSOR *스타트렉 전력 70분 주제 '아이돌'로 참여했습니다. SPONSOR “그 바닥에서 일하기엔 나이가 좀 있지 않나?” 상냥하지 못한 말은 그가 방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귓가에 울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띄워놓던 거짓 미소가 잠시 흔들리다 되돌아왔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가뜩이나 떨리던 목소리는 애써 가다듬어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남자는 소파 등받이에 깊게 묻었던 등을 펴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말없이 술루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이내 다리 위에 걸쳤던 팔을 들어 그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더, 가까이 와 봐. 입가에는 천진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술루는 그것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였다. 아니, 애초에 그가 그 방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는 안전하지 못했다. 그는 포식자의 굴.. 더보기
[벤술루] 조각글 히카루. 오랜만이에요. 히카루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기뻐요. 정말 보고싶었어요. 이번에도 건강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으음, 당신이 주고 간 화분이 얼마나 자랐는지, 데모라가 얼마나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지, 하나하나 전부 말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조금 참으려고 해요. 다른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조금,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들어줄 수 있어요, 히카루? 히카루, 나의 세상은 아주 작아요. 나는 별 것 아닌 시시한 작가고, 사랑하는 사람과 예쁜 딸이 있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하루하루 흐르는 일상은 평이하기 그지없어요. 타인의 눈에는 지루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그런 삶이죠.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거대한 함선을 몰며 우주를 항해하지요. 끝이 없다고들 말하는 그 미지의 바다에서 당신은 수많은 위험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