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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ST

[본즈술루] 너의 조각들



*사망소재(자살) 주의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문득문득 마음을 채우는 생각의 시작은 뚝뚝 떨어지는 새카만 수채 물감 같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으나 순식간에 마음을 짙은 색으로 물들였다는 점에서 그랬다. 나는 온통 젖어들어 축축하고 지저분해진 마음을 빨아 다시 희게 만드는 대신에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기로 했다. 일종의 상복이었다. 동시에 너를 죽게 두었던 나에게 내리는 하나의 형벌이기도 했다. 너를 살리지 못했던 내가 속죄의 의미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매일을 너를 추모하고 나를 벌하며 살기로 했다. 나답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이상하지는 않았다. 너는 나를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던 사람이었으므로.


우스운 것은 내가 너를 제대로 떠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너를 떠올리려 마음을 먹으면 뇌리를 스치는 것은 온통 비틀리고 드문드문 끊긴 이미지들이었다. 싸구려 영화의 불안한 화면처럼 흔들리는 짤막한 영상들이 눈앞을 메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감정, 내가 네게 느꼈던 그 감정들만은 선연히 날이 서 여전히 간혹 내게 상처를 입혔다. 그것은 때로 절망이었고 슬픔이었으며 때로는 설렘이었고 때로는 지독한 애정이었다. 아, 애정. 내가 네게 느꼈던 마음들의 핵심에 서 있는 것은 애정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그것을 끔찍이 후회했다. 하지만 실은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만큼 내게 다행인 것도 없으리라. 무디어진 가슴이 다시 상처를 입을 수 있을 만큼 그 껍데기를 벗겨낸 것은 결국 사랑이었으니. 


네 혈관에는 피 대신 우울이 흘렀다. 걸러내어지지 못한 선명한 우울의 한가운데에 너는 서 있었고 나는 너의 그 끝없는 우울을 치유하고자 했다. 1인실의 벽은 희었고 나는 그 흰 벽에 붙은 침대에 앉아 있던 너를 기억한다. 닥터 맥코이, 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내가 차마 다 알 수 없는 복잡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감정을 갈무리하는데 익숙했던 네게 나는 도통 적응을 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너를 지켜본 후에야 나는 간신히 네 말과 행동에 담긴 마음을 짐작해낼 수 있었다. 너는 더없이 우울했으며 절망스러워 했고 가끔은 죽고 싶어 했다. 그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법을 배워내는 동안 소년은 청년으로 자랐고 나는 네게 조금 다른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작이 애정이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 기원은 동정심과 다정의 결합이나 혹은 그 중간 지점 어드메였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것이 사랑으로 자라나는 것을 일찍 알아채지 못했다.


사랑을 먼저 눈치 챈 것은 내가 아니라 너였다. 어느 주말 오후의 면담에서 너는 보기 드문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 나는 닥터 맥코이를 사랑하는데, 왜 여전히 이렇게 우울하죠. 아니, 그것은 물음이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나는 멍해지는 정신의 가닥을 붙잡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당신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요. 속삭이는 것처럼 쏟아진 말에 나는 여전히 대답을 내어주지 못했다. 단지 이상하게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느릿하게 숨을 쉬었을 뿐이다. 술루, 간신히 이름만을 중얼거리는 것에도 너는 살풋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 밤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네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너는 절대 내게 직접적인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너의 고백 아닌 고백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밤새 고민했지만 해답은 새벽에야 얻을 수 있었다. 먹지 않고 몰래 모아 두었던 약을 모두 삼킨 채 투신했다는 말이 수화기 너머에서 넘어오자 나는 다시 한 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네가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네가 그렇게 단숨에 사라져버리리라는 것은, 아아. 나는 그것이 너의 유언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챘어야 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보다도 먼저 알아내었어야 했다.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으리란 믿음, 너와 내가 우리라는 이름 아래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것은 모두 한낱 꿈에 불과한 이야기들. 스러지고 부서질 순간의 반짝임들.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널부러진 것은 백일몽의 조각들이었고 나는 그것을 주우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은 깨어지는 순간에마저 지독하게 아름다워서. 눈부신 빛을 반사해내는 모양에 나는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너의 죽음은 생각보다 더 아팠고 네게 느낀 그 애정은 피기도 전에 초라하게 지어 버렸다.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예민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나 너의 죽음에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허나 나는 그 후로 온통 날이 섰고 죽을 것처럼 아파했다. 나는 이미 너와 함께 죽어버린 것 같았고 살아 움직이는 것은 너로 인해 갈라내어진 껍데기뿐인 것 같았다.


나는 종종 책상 앞에 앉아 너의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기억들은 모래처럼 손틈새로 빠르게 흘러내렸고 나는 그것들을 쥐어 보려 애를 썼다. 헛된 노력이었다. 나는 너를 온전히 기억해내지 못했고 스스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꿈의 잔재가 나를 해치지 못하도록 스스로에게 방어벽을 세우는 것이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인정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이기적이었고 내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나 스스로를 지독하게 증오하는 와중에 종종 생각했다.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부서지지 않은 꿈을 현실로 바꾸어낼 수도 있었다.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실과 꿈의 다른 점은 거기에 있었다. 너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너를 살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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