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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D/ST

[커크술루] 사랑에 대하여




진단메이커: 그저 꿈일 뿐인/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당신은 왜 나만 두고 갔나요?






당신은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당신의 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는 지금이 일곱 시 반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러면 졸린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켜 창문 앞에 가서 섰다. 당신을 닮아 유려한 선의 새카만 차가 차고를 빠져나가 느릿하게 달리기 시작하는 모양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차의 뒤꽁무니가 점점 지붕들 사이에 가려지고는 했다. 나는 그제야 기지개를 켜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면 나는 종종 늦장을 부렸고 당신의 차가 다시 들어올 때까지 근처 공원의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웠다. 아이들이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나는 홀로 그네에 앉아 다리를 모래밭에 늘어트렸다. 신발 속으로 잔 모래알들이 들어와 발바닥이 까슬해지면 그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때쯤이면 당신의 차가 공원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고 그러면 당신의 차가 차고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밤에는 부러 창가에 앉아서 숙제를 하고는 했다. 당신의 창의 불은 일찍 꺼지는 편이었고 나는 그것이 꺼지는 것을 본 후에야 숙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음습하기 그지없는 스토커 같은 짓이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나는 당신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만히, 비밀스럽게.



내가 당신을 알게 된 계기는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것이었다. 어느 느즈막한 일요일 오후에 당신은 앞마당의 잡초를 다듬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창밖으로 훔쳐보았다. 당신의 입가에 옅게 띄워진 미소에 한 번 심장을 난도질당한 나는 이내 당신의 그 반짝이는 새카만 눈동자에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칭했다. 그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인 동시에 기쁨을 사랑이라고 명명했다. 나의 바라봄이 시작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당신이 나오기를 기다렸으며 밤늦게까지 당신의 창문만을 바라보았다. 이내 나는 당신이 혼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신이 매일 아침 일곱 시 반에 출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당신이 주말마다 마당을 가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정작 당신의 이름 하나도 알지 못했으며 그 사실은 나를 못내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괴로운 것은, 당신이 언젠가부터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당신과 그는 꽤나 친밀해 보였다. 아니, 실은 단순히 친밀해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당신과 그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의 방문 빈도는 점점 높아졌고 나의 괴로움은 그에 비례해 불어났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당신도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스스로의 그 안일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왜 당신에게 말 한 마디 걸어보지 못했는지 후회하는 밤들은 당신이 마침내 이사를 가던 날까지 이어졌다. 짐을 한가득 실은 트럭이 당신의 차 뒤꽁무니 대신 멀어져가던 모습은 뇌리에 박혀 영영 잊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당신은 왜 나만 두고 갔나요?



애처롭게 떨어지는 질문은 마음속에서만 울렸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물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당신과 나는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그저 한낱 꿈일 뿐인, 덧없는 환상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당신을 원망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나에 대한 사랑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또 상상했으나 그것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깨어지고 부서졌다. 공허한 심장 한 가운데에서 오로지 사랑만이 맥 대신 뛰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바라볼 수 없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 가득 쌓인 어둠을 끌어안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바라볼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잔인한 당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리지 않을 고백을 속삭였다.



사랑해요.



어둠이 당신의 눈동자를 닮아, 나는 여전히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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