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루는 벤이 싫었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다 보면 그냥, 이유 없이 좀 별로인 사람 한 사람 정도야 있지 않은가. 히카루에게는 벤이 그런 사람이었다. 첫 만남부터 왠지 묘하게 짜증이 났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도, 다부진 체격도, 특유의 다정한 말투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히카루는 벤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도 웃음기 없이 건조한 반응만을 보일 따름이었고, 간혹 실수로 몸이라도 부딪히면 하루 종일 뚱한 표정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티를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사실 벤도 히카루가 싫었다. 여유 없이 끝까지 단추가 채워진 사립학교 교복 셔츠라든가, 영 딱딱해 보이는 까만 뿔테안경, 혹은 성격이 드러나는 반들반들한 구두 같은 것들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아니, 사실 그건 핑계고. 벤 역시 히카루가 아무 이유 없이 싫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뭐, 엄밀히 말해 처음부터 그렇게 싫었던 것은 아니었고, 단지 이상하게 마음에 조금 걸리는 구석이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쪽에서 대놓고 제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태도를 내세우니, 당연히 싫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고, 히카루의 등교 시간과 벤의 출근 시간은 정확하게 겹쳤다. 둘은 일주일에 못해도 오 일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고, 그 안에서 어색함과 위화감으로 가득한 공기를 마셨다. 처음 히카루가 이 건물로 이사해 올 때쯤에는 벤이 매일 제대로 받아지지 않는 아침 인사라도 건넸지만, 이제 그가 그것마저 포기한 이상 두 사람의 만남에는 찬 기운만이 돌 수밖에 없었다. 말라비틀어진 적막만이 흐르는 일 분 삼십 초는 두 사람에게 일종의 고문이었다.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상대의 얼굴로 시작하는 하루라니 기분이 나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조금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날은 히카루가 벤을 나흘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지 못한 날이었고, 동시에 벤의 여름휴가가 꼭 나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오후 늦게야 침대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온 벤은 창틈으로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날씨 엄청 좋네. 이런 날에는 모름지기 시원한 카페 구석에 앉아 아이스커피와 함께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렇게 눈부신 날에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날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말이다.
그렇게 책 한 권과 지갑만을 챙겨 나온 그의 발걸음을 느닷없이 멈춘 것은 의외로 꽃집이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지만 제법 싱싱한 꽃들과 화분들이 열린 꽃집 문 사이로 들여다보였다. 꽃을 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식물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고 꽃집에 가지 않은 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구경이나 할까, 어쩌면 다육 식물 화분 하나 정도는 살지도 모르지. 그는 고심 끝에 열린 문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사한 꽃향기와 싱그러운 잎 냄새가 뒤섞여 꼭 숲속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좋다. 살짝 들뜬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그러나 이내 익숙한 인영을 포착하고는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영 불편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은 앞치마를 하고 선 히카루였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벤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마주 인사를 건네는 벤에게 히카루는 짝다리를 짚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척 보기에도 귀찮아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 저. 식물을 좋아해서, 잠시 보려고 들어왔어요. 벤이 대답하자 히카루의 태도가 묘하게 바뀌었다. 슬쩍 비스듬하게 구부렸던 자세를 바로 편 그는 조금 떨떠름한 투로 중얼거렸다.
“식물 좋아하시는 건 몰랐네요.”
“아, 네, 뭐.”
얼떨떨한 마음으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히카루는 심각한 내적 갈등에 휘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아, 내 신조는 식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없다는 건데, 저 사람이 식물을 좋아한다네. 어떡하지? 나름 진지한 고민에 빠진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벤은 슬쩍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기, 여기서 일하세요? 네, 아르바이트... 식물 좋아하셔서 여기 계시는 거예요? 아, 네... 이상하게 말끝을 자신 없이 흐리게 되는 제 입이 미워 히카루는 괜히 입술을 씹었다. 그런 히카루를 지켜보던 벤은 주변을 슬슬 둘러보고는 아, 탄성을 질렀다. 저 화분이 있네요? 저거 희귀한 걸로 알고 있는데. 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에는 정말 희귀한 종류의 다육 식물 화분이 놓여 있었다. 아, 저걸 알아보다니, 이 사람은 진짜다. 히카루는 더 깊은 고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아, 어떡하지. 지금 좀 호감 생겼는데. 여태까지 내가 너무 재수없게 굴어서 나 싫어할텐데. 근데, 이렇게 식물 좋아하는 사람을 놓치긴 싫고. 아, 어떡하지, 어떡해?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히카루를 벤은 슬쩍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 하는지, 표정만 봐도 대충 알 듯했다. 보나마나 저와 비슷한 고민 중일 테다. 여태껏 그렇게 서로 싫어했는데, 이제 와서 희귀하기 그지없는 공통의 취미를 발견하다니. 벤의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 같았다. 아니, 하필이면 이렇게 될 게 뭐람? 두 사람은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이 똑같은 타이밍에 한숨을 흘렸다. 흐르는 정적은 삭막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두 사람을 시원한 숲의 향기가 감싸안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관계의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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