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체콥
사내는 소년의 어눌한 발음을 사랑했다. 뭉개지면서도 톡톡 튀어오르는 것 같은 독특한 발음과 억양은 이상하게 늘 사내를 들뜨게 했다. 그가 소년이 약을 먹어야 한다고 조잘댄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도 같은 선상에 있는 일이었다. 소년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은 흰 알약을 집어든 그는 소년에게 입을 벌릴 것을 종용했다. 느릿하게 말을 따르는 소년의 눈에서는 당혹감이 비쳤다.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보이는 고른 치아와 분홍빛 혀에 사내는 기이한 떨림을 느꼈다. 조금 더, 사내의 종용은 속삭임과 같았다. 소년은 조심스레 입을 더 벌렸고 사내는 그것에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 착하지. 사내는 손을 뻗어 알약을 소년의 혀에 얹었다. 소년은 쓴 맛이 입 안에 퍼지자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보다도 더 어눌한 발음으로 소년은 무어라 말을 건넸지만 사내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라도 맺힐 것 같이 눈시울이 붉어진 소년을 보던 사내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뛰었다. 미스터 칸, 간신히 사내의 이름을 뱉는 소년에게 그는 참지 못하고 서둘러 입을 맞추었다. 키스에서는 쓴 맛이 났다.
커크술루
그러니까, 분명 나쁜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술루가 남긴 당부 중에 화분에 대한 게 없다 싶었다. 물을 주면 오히려 죽어버리는 식물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괜히 툴툴거려 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커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거무죽죽한 색이 맑은 초록을 뒤덮은 모양이 된 잎을 만지작대던 그는 술루가 내일 출장에서 돌아온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했다. 큰일 났군. 커크는 화분의 종류도 알지 못했고, 설사 안다고 한들 새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술루라면 아끼는 화분이 달라졌다는 것 정도는 한 눈에 알아차릴 테니까. 많이 아끼는 건데, 돌아오면 꼼짝없이 혼나겠군. 술루의 굳은 표정과 매서워진 목소리를 상상하며 커크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재롱이라도 부려야 하나, 화나면 무서운데. 안 그래도 꼼짝없이 잡혀 사는 그에게 고민이 하나 늘었다.
커크술루
히카루. 짧게 뱉어진 이름에 술루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매섭게 떴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심장이 쎄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술루. 작게 중얼거려진 이름에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단호하게 뒤로 돌아서는 모습에 커크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다만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붙잡기 위해 튀어나온 것은 정제되지 않은 말이었다. 미스터 술루,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절박한 목소리에 술루는 몸을 돌려 커크를 향했다.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새카만 눈동자를 응시하는 푸른 두 눈에는 비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커크는 애써 잠기듯 닫힌 입을 떼었다. 부들거리는 입술에서 나온 말은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
나를, 사랑했어?
단 한 순간이라도? 그것이 흡사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묻는 커크를 술루는 한참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기어코 잇새를 비집고 나온 말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질기만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가운 자욱만을 남기고 재차 멀어져가는 등을 보며 커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본즈술루
꽃집이 생겼다.
하필이면 병원에서 도보 오 분 거리였고, 하필이면 맥코이의 출퇴근길에 자리하는 곳이었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출근을 하다 보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상쾌한 풀냄새가 났고, 매일 저녁 지친 다리를 억지로 끌며 퇴근하다 보면 닫힌 문 사이로 달콤한 꽃내음이 새었다. 간혹 시간이 나 배달 음식 대신 제대로 된 점심을 먹으러 외출을 하는 날이면 그는 홀린 듯이 꽃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자주 가던 중국 요리집은 완전히 반대 방향이었기에 그는 결국 맛없는 샐러드 정도를 질겅질겅 씹어야 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퇴근길에 문이 닫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왠지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출근길에 활짝 열린 문은, 그의 이 기행을 설명하는 이유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열린 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꽃집 주인의 모습이 이유였다. 검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한 뒤통수가 눈앞을 스치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이 화분들을 살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은 커다란 물뿌리개로 처음 보는 식물에 물을 주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화사한 꽃다발을 품에 반쯤 안고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맥코이는 그런 모습 하나하나를 기억에 박아넣고 마음에 새기었다. 수많은 모습들이 남았지만 늘 성에 차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괜히 느릿느릿 걸으며 조금이라도 오래 그 유리문 너머를 들여다보려 했다.
꽃이나 화분 같은 것들을 관리하는 쪽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사람 살리는 의사가 화분은 못 살리냐? 언젠가 커크가 가볍게 던졌던 농담이 처음으로 진지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래, 사람도 살리는데 화분도 노력하면 살릴 수 있겠지. 억지로 내린 결론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들뜬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고민했다고 혼자 중얼거린 그는 결국 어느 비 오는 새벽 꽃집 문 앞에 섰다. 아직 열리지 않은 문 너머로 보이는 부산스러운 몸짓들에 맥코이는 결국 미소를 지어버리고 말았다. 선인장 하나 주세요, 혼자 입모양으로 몇 번 말을 연습한 그는 용기를 내어 꽃집 문을 두드렸다.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사랑에 빠지는 소리였다.
놀이공원에 오면 이런 거 꼭 해보고 싶었어요. 장난기가 가득 담긴 말과 동시에 벤의 머리 위에 머리띠가 엉성하게 올라앉는다. 졸지에 커다란 빨간색 리본을 머리에 쓴 꼴이 되어버린 벤은 머리띠를 제대로 정리해 쓰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괜히 리본 한 쪽을 만지작대던 손은 이내 가판대에 걸려있는 머리띠로 향한다. 까만 고양이 귀 모양의 천이 붙어 있는 것을 집어든 벤은 히카루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그것을 씌웠다. 서로의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히카루,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에요? 벤이야말로 정말 잘 어울리는 걸요. 조잘대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어려 있었다. 안 되겠다, 오늘 우리 이거 계속 쓰고 다녀요. 다짐하듯 말하는 히카루의 모습을 벤은 마냥 좋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래요, 히카루가 원한다면. 다정한 웃음이 벤의 얼굴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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