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과 데모라를 잃은 술루, 그를 사랑하는 커크.
인생은 예상할 수 없는 일들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더없이 맑은 색채만이 더해질 것 같던 인생의 길에 느닷없이 새카만 페인트가 뿌려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말이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하나의 작은 사고의 형태로 찾아왔다. 어느 부주의한 운전자의 실수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뗀 발걸음이 한 남자와 한 아이의 죽음을 낳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가족의 부고를 전해들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뒤늦게 터져 나온 울음은 오열이 되지 못하고 삼켜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가슴을 갈라놓았지만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망함으로 채워진 마음은 존재 자체로 모순이었다. 그러다가 외로움과 절망과 고통이 나를 덮쳐오면 나는 어미를 잃은 새끼 짐승마냥 벌벌 떨었다. 견딜 수 있다고, 버틸 수 있다고 자부했던 것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나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약했으나 그것을 티내지 않을 수 있을 만큼만은 강했다. 딱 그만큼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엔터프라이즈에 돌아왔고 걱정하는 시선들에 억지라는 것이 티 나지 않는 가벼운 미소마저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딱 그만큼이었다.
처음으로 그와 밤을 보낸 것은 가족을 잃은 지 일 년째가 되던 날이었다. 반쯤 충동적이었고 반쯤 의식적이었다. 나는 나의 어두움을 받아줄 누군가를 필요로 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줄 수 있을만한 사람처럼 보였다. 가볍게 술을 몇 잔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찾아온 정적 속에서 나는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고 혀가 섞이는 중에 그는 내 등에 손을 얹고 가볍게 토닥였다. 나는 순간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뒷목에 감고 매달렸다. 진득해지는 입맞춤 속에서 내게 남은 것은 방향을 알 수 없는 절망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절망에 방향성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정신없이 서로의 옷을 벗겨내고 몸을 더듬는 과정 속에서 불안정한 심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침에 마주한 것은 그의 벗은 등이 아닌 작은 쪽지였다. 없던 일로 하자. 글자 외에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품은 것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일종의 절박함이었고 나는 대상이 불분명한 비웃음을 웃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눈치 챈 상태였다. 아아, 그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를 필요로 했다. 공생 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이 어디 있을까. 서로를 미치도록 좀먹고 보이지 않게 파괴해가는 이 비정상적 관계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나는 거기에 물을 주기만 하면 되었다. 잘못된 욕망이었으나 내게는 훗날의 부서짐보다는 지금의 갈망이 더욱 크게만 보였다. 나는 제임스 커크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사랑하는 척은 할 수 있었고 언젠가는 무너질 그 위태로움을 신경쓰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끔찍하게 이기적이었다.
그는 내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알기라도 하는 듯 눈에 띄게 나를 피했다. 나는 그런 그를 눈에 띄지 않게 쫓으며 은근한 시선을 흘렸다. 나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도 나를 원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요-올바르지 못한 유혹을 함의하는 눈짓들에 그는 저항했다. 그러나 회피의 시도들은 허망하게 부서졌고 그는 결국 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왜 그래, 미스터 술루.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함장님. 그는 으르렁거리듯 숨을 몰아쉬다가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그의 손이 다시 내 등 위로 올라왔지만 나는 전보다 담담하게 그것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손길은 그의 입술과는 상반되었지만 나는 되려 눈을 꾸욱 감았다. 그의 눈만큼은 손과 같은 감정을 담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긋난 관계에서 어려웠던 것은 시작뿐이었다. 폭주하듯 추락하는 두 사람에게 붙여지는 이름은 연인도 타인도 아니었다. 한 쪽의 사랑과 한 쪽의 갈망으로 이루어진 기형적인 감정의 교류는 정신을 파훼했다.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았던 관계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에 나는 종종 죽고 싶었고 차라리 그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원했다. 많은 것이 잘못되어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추적할 수 없었다. 수도 없이 입을 맞추고 몸을 섞었지만 고독도 절망도 해결되지 않았다. 점점 더 깊어지는 수렁에 빠진 것 같았다.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였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푸른 눈동자는 그 색만큼 깊었고 슬펐다. 나는 망가진 마음을 움직여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당신이 바라보았을 나의 수많은 등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등을 볼 수 있게 되면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럼 등을 계속 보다 보면 사랑에 빠질 수도 있나,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다 순간 폐부를 찢는 것 같은 통증에 낮게 신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그의 등은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나는 그 넓은 등을 보며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뒤늦게 폭발하는 감정들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함장님, 커크 함장님...제임스, 짐. 잇새로 새어나오려는 호칭들을 황급히 갈무리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야 어렴풋이 알게 된 마음은 이미 충분히 부서진 마음이 소화하기에는 너무 난폭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나를 잠식한 암흑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의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고.
나는 어쩌면 그를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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