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즈미 씨, 오늘은 무얼 하고 있어요?
이와이즈미 씨, 점심 식사 안 하세요?
이와이즈미 씨, 날씨도 좋은데 같이 산책하지 않으실래요?
이와이즈미 씨, 이와이즈미 씨.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어요?
[이와카게] 피그말리온
“..즈미...일어날...에요...”
아득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맑다. 그토록 늘상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이렇게 가까이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이 순간은 분명 꿈이다. 지독하다, 다시 네 꿈을 꾸고 말았다. 눈을 세게 감으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만, 그만. 이 정도면 됐잖아, 이제 그만 날 괴롭혀도 괜찮잖아. 그렇게 속으로 중얼대면서도 어렴풋이 깨어 가던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 마음을 먹던 순간, 더없이 흰 빛이 몰아쳐 감은 눈 속으로 들어앉는다. 한순간 확 돌아오는 정신에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으으, 짧은 신음성을 내뱉고 몸을 일으킨다. 부신 눈을 천천히 뜨다가, 이윽고 둥글게 부릅뜬다.
“이와이즈미 씨, 일어날 시간이라니까요?”
활짝 젖혀진 커튼이 열린 창문 틈 새로 들어온 바람에 가벼이 흔들린다. 그리고 그 앞, 밤 하늘 빛깔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버릇처럼 삐죽이는 입술은 사랑스러운 타박을 뱉는다. 검은 머리칼이 푸스스 흐트러지는 모양이, 네모난 모양으로 들어와서는 쏴아아 쏟아져 흩어지는 빛에 번져 아른거린다. 눈이 부신 것은 햇살일까, 너일까. 그렇게 꿈을 꾸는 기분으로 너를 바라보다 다시 깨닫는 한 가지.
너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기억들이 되돌아온다. 어제 너를 도닥이다 잠들었던 기억부터 시작해, 식사를 하다가 네 입가에 묻은 얼룩을 문질러 지워 주던 기억이, 무어라 조잘조잘 묻는 말들에 네 머리를 헝클며 대답하던 기억이, 날씨가 좋다며 커튼을 걷던 너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던 기억이, 그리고 햇살이 비치는 어느 아침, 이렇게 너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너를 끌어안던 기억이, 되돌아오고, 그리고, 그리고...그 생각의 끝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어느덧 내 앞에 앉은 너를 어제처럼 너를 끌어안는다.
“여기 있어줘서 고마워, 토비오.”
품 안의 네 귓가에 중얼거리니 네가 간지럽다며 투덜거린다. 아랑곳하지 않고 귓가에 잘게 입을 맞추니 고개를 팩 돌리곤 밉지 않게 쏘아본다. 피식 웃고는 볼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너를 놓아준다. 네가 또 입을 삐죽거리며, 잠꾸러기 아저씨의 까칠까칠한 뽀뽀는 사양이거든요, 얼른 씻고 아침이나 드세요, 하고는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나가 버린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불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나온다. 네 투정도 타박도 다 사랑스러워 보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
“...네가 한 거 맞아?”
하얀 식탁보가 덮인 나무 식탁 앞에 앉은 네 맞은편의 의자를 빼 너와 마주보고 앉는다. 식탁 한 가운데에 예쁘게 차려진 계란 프라이와 잼 발린 토스트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아는 너는 요리라곤 도통 할 줄 아는 게 없는 녀석인데. 뭐, 거창한 메뉴가 아니더라도 아침을 차리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좀, 안 어울리는 느낌이지. 내 반응에 네가 살짝 발끈하고는, 이 정도는 할 줄 안다고 조금 높은 목소리로 꿍얼댄다. 그러고는 또 삐죽거리는 입술이 사랑스러워, 손가락을 뻗어 한 번 꾹 누른다.
“고마워, 토비오.”
갑자기 다가온 손길에 놀랐는지 둥그렇게 커진 눈을 보며,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꾹 참고는 네 앞의 접시에 계란 프라이 하나를 담아준다. 멍 그만 때리고 식사해. 그러고는 내 접시에도 음식을 덜어 입에 넣는다. 너는 그제야 갈 길을 잃었던 눈동자를 붙잡고 느릿하게 손을 놀리며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다. 네 귓가가 살짝 붉어진 듯 하다. 몇 년을 함께 했는데도, 아직도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수줍어하는 네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네게 보이지 않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는 설거지 때문에 투닥투닥. 기어코 뒷정리까지 다 하겠다는 네게, 늦잠을 잔 사람이 벌칙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며 고무장갑을 꼈다. 달그락거리며 몇 개 되지도 않는 설거지감들에 세제를 묻히는 내 옆에 네가 계속 알짱거린다. 가서 쉬어, 해도 싫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말 안듣네, 참, 으름장을 놓아도 입만 삐죽거리며 자리를 뜨지 않던 너는 결국 내가 건조대에 접시들과 식기들을 다 내려놓을 때 까지 내 옆을 서성인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놓는, 작고 둥그런 사탕 같이 생긴 무언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또 고개를 갸웃한다.
“뭐야, 이게?”
“또 까먹으셨어요? 비타민이잖아요. 이와이즈미 씨 드시는.”
그럴 줄 알았다며 꽁알대는 네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잔소리쟁이 토비오, 하고는, 네 손바닥 위의 사탕같은 것을 집어 입에 넣는다. 빠르게 녹아내리는 쓰지도, 달지도, 시지도 않은 미묘한 맛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네가 손가락을 뻗어 그 사이 주름을 문지른다. 그러다 진짜 주름져요, 하고는 손을 떼는 너의 모습에 나는 결국 작게 웃음이 터져 버린다. 왜 웃으세요, 뾰로통하게 말하며 샐쭉하게 나를 보는 네가 좋다. 네가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
-
햇살은 여전히 맑다. 나른하게 내려앉는 오후의 공기에, 나는 내 품 안의 너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얼굴 이곳 저곳에 몇 번 입을 맞춘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 앉은 내게 네가 다시 기대 앉아, 그렇게 서로를 온전히 느끼는 이 시간이 따스하다. 나를 올려다보는 네 머리칼을 어루만지다 어지러뜨리니 네 잔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이와이즈미 씨, 자꾸 그렇게 다 헝클어놓을 겁니까? 싫어? 싫...진 않은데. 그렇게 솔직하게 네 마음을 말해 버리는 모습이 예뻐서 또 입을 맞춘다. 이마, 눈가, 콧잔등, 볼, 광대뼈, 입술, 턱끝...그렇게 한참 네게 입술도장을 찍다가 떨어진다.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네가 입을 뗀다.
“이와이즈미 씨, 예전에 오이카와 씨가 해준 얘기인데요.”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그리스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대요. 그 조각가는,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해서 진짜 사람인 양 대하면서 함꼐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말이죠, 그걸 알고는 어떤 여신이 그 조각상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서, 결국 자신이 조각한 조각상과 결혼했다고 하는데, 음.......처음에 들었을 땐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그 여신이 없었다면 피그말리온은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그걸 영원히 몰라준다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차라리 그 조각상이 자신의 마음을 모른다는 걸 피그말리온도 알지 못했다면 몰라도. 아니면 그냥, 그냥 그 조각상이 진짜 사람이라고 믿어버렸다면, 차라리.......
뜬금없는 이야기도, 네가 조근조근 말을 뱉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 가만히 듣고 있는다. 한참을 천천히 말을 잇다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모두 마친 모양인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그 눈동자를 보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느릿하게 네게 입을 맞춘다. 가만히 입술을 열어 나를 받아들이는 네게만 집중하는 이 시간, 햇살은 여전히 맑다.
-
밤에는, 꿈을 꾼다.
눈 앞에 가득한 붉은 자욱들이, 눈물로 흐려지는 순간이 아득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놓고 간 흰 꽃들을 황망히 바라본다. 그리고 네가 보인다. 검은 리본이 감긴 액자 속에서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무너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너를 꼭 닮은 얼굴이 해사히 웃는다. 그 속에 들은 것은 차가운 금속임을 알고 있어도, 나는 다시 네가 돌아온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다시, 네가 사라졌던 나날들을 잊으려 애쓴다. 둥그런 알약 속에는 망각이 들어 있다. 한 알 한 알 삼킬 때마다 기억들이 깎여나간다. 그렇게, 지금의 네가 진짜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킨다.
“이와이즈미 씨?”
네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나는 너를 잃었는데,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게 너일리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눈을 떠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다. 그리고, 아침 햇살이 드는 창을 등지고 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간밤의 꿈이 그저 악몽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별이 담긴 그 눈동자를 반짝이며 네가 웃는다. 맑게 터져나오는 그 웃음에 나도 따라 웃는다. 내가 사랑하는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여전히, 햇살은,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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