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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HQ

[쿠니카게] 친구




*ts 주의



까만 치맛자락이 올라가 그을린 종아리가 언뜻언뜻 드러날 때, 바람이 불어와 새카만 머리칼이 살살 흩날릴 때, 오래 쬔 햇빛에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 때, 나는 너를 끌어안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차라리 나와 네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 여름의 초입. 봄과 여름의 그 아른아른한 경계 위에서 나는 완전히 미친년이었다.

 


쿠니미 아키라x카게야마 토비오

친구



너는 처음부터 지독히도 예뻤다. 희지 않은 얼굴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에도, 파랗고 검은 눈동자가 살금살금 오가며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때에도, 심술을 내듯 얇은 입술을 주욱 내어 비죽거릴 때에도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며 무언가 기묘한 감정이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영원히 너를 바라보고만 있고 싶은 마음과, 영원히 너를 보지 않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며 어지러이 얽혀 들어갈 때마다 나는 손목에 비치는 파르스름한 혈관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아, 나는 지독하게도 살아있어, 하고.

 

바꿔 말해, 나는 살고 싶지 않았다. 새파란 핏줄보다도 더 푸른 우울에 빠져서는 헤엄치기를 포기하고 둥둥 떠가는 시체와 같은 삶. 구름 사이로 스미는 햇살과 같은 너를 미워하는 동시에 갈망하는 내 자신에게 혐오와 연민 사이 즈음의 무언가를 느끼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너를 미치도록 원하고 있었고 그래서 너를 미치도록 원망하고 있었다. 무료의 정점에 가만히 서 있던 나를 한 순간에 욕망의 저 나락까지 끌어내린 너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그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마음에 중얼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네게 다가가지 않겠다고 마음 한 구석에 새기었다. 날카로운 사금파리가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때마다, 틈에서는 푸른 우울이 피처럼 흘렀다. 나는 그것이 마음 속에 넘실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어딘가로 흘려 보내기로 작정했다. 감은 눈 틈으로 흐르는 것은 희석된 우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삶은 늘 내게 가장 최악의 것을 선사하곤 했다. 예를 들자면, 텅 빈 음악실에서 낡은 피아노를 두드리는 너, 같은 것. 네 머리칼만큼이나 새카만 피아노 앞에 앉아 서툴게 건반을 누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 한 구석의 글자 모양 흉터 새로 무언가 울컥이며 흐르는 것을 느꼈다. 충동과 환희와 갈망과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감정이 토해지기 전에 발을 옮겼어야 했는데. 나는 홀린 것처럼 느릿하게 음악실 문을 열었다. 더듬거리는 어설픈 연주가 겁을 먹고 숨어들었다. 나는 어느 새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피아노, 가르쳐 줄까?”

 

아니라고 해. 아니라고 해 줘. 더 이상 내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지 마.

 

“….”

 

정말, 나는 네가 미치도록 싫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엷게 웃고는 네 옆에 앉았다. 조금 긴 네 치맛자락이 내 다리에 쓸리는 것이 아찔했고 아득했다. 나는 가만히 피아노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네가 치던 곡조를 쳐 보였다. 네 시선이 내 손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눈을 감아버렸다. 암흑 속에서 절망과 환희가 동시에 흘렀다. 온통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엉망이 되어 버린 풍경을 외면하려 다시 눈을 떴다. 곡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와아, 네가 작게 탄성을 지르는 것이 들리자 나는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대신에 너를 바라보았다.

 

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같은 반이었지만 단 한 번도 너를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길고 짙은 네 속눈썹과,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듯 조금 푸석하게 튼 입술 안쪽, 귓가에 잘게 나 흐트러진 잔머리가 예쁘고 또 예뻐서 나는 잠시 당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조금도, 아주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도 조금 무서워져 살기 싫은 생각이 들었다.

 

손 올려봐. 같이 쳐 보자.”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손을 가만히 피아노 위에 올렸다. 나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망설이다가 네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내 손바닥에 와 닿는 네 손등은 내 것 만큼이나 보드라웠다. 나는 천천히 손을 놀리며 네 손가락 위로 내 손가락을 눌렀다. 여기, 미 음에서 시작해서, , 다시 미, 파는 샵이 붙었고. 나지막이 중얼이며 움직이는 손을 너는 그대로 따라왔다. 나는 문득 이대로 네가 가지 못하게 네 손을 잡아놓고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해 버리고 말았다. 미친년, 제대로 미친년. 머릿속에 울리는 온갖 목소리들의 전원을 끄고 나는 다시 네게 집중했다. , , 다시 도. 내 장례식에서는 이 음악을 틀어주었으면 해.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다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느릿한 연주가 끝나는 것에 맞추어 종이 쳤다. 점심 시간, 벌써 거의 다 끝났네. 중얼거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가자. 말하는 내게 너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여 보였다. 문득 네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평온해 보여 나는 작게 욕설을 뱉었다. 씨발, 멀쩡한 년인 척 하는 것 좀 봐.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나는 또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뭐 해, 가자니까. 너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달콤한 투로 내뱉었다. 아니, 내가 미쳐서 그렇게 달게 들렸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앞으로도 종종, 도와줄 수 있어?”

 

피아노를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다급하게 덧붙이는 말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이것이 향기로운 독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순간의 충동에 휩쓸려 답하고 말았다.

 

물론이지. 우리 같은 반 친구잖아.”

 

미친년도 이렇게 미친년이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이번에는 속으로 거세게 욕을 중얼거렸다. 씨발, 지랄하고 있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손목을 그었다.

 

내가 처음으로 네게 내 비밀을 조금 보여준 것은 그로부터 이 주 뒤였다. 점심시간이며 방과 후 마다 음악실에서 만났던 나와 너는 여전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였지만, 나는 네가 내게 묘하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전보다 힘이 빠진 손이라든지, 은근히 내려간 듯한 눈꼬리라든지 하는 것들에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네게 무언가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것이 완전히 미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네게 살짝 틈을 열어주고 말았다.

 

내가 비밀 하나 이야기해줄까?”

 

나는 사실, 살고 싶지 않아.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달콤한 독을 네 귓가에 탔다. 그 독이 네게 스며들어 네 마음 한 구석을 물들이고 오염시켜버릴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미칠 거면 곱게 미쳐야지,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또 윙윙 울렸지만 나는 귀찮다는 듯 또 귀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오직 너를 바라보았다.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오직 단 하나의 이유인 너를. 너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혼란을 표했다. ? 간신히 네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질문에 답하는 대신 나는 아예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친구지?”

 

아니, 하고 먼저 선수를 쳐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네가 대답을 내기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그대로 너를 안고 저 창 밖으로 투신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으나, 결국에는 웃으며 제안을 하나 내었다. 있잖아, 우리가 친구라면 말이야.

 

나랑 맹세해 줄 수 있어? 영원히 친구로 남아주겠다고.”

 

네게 타 놓은 독약이 효력을 발휘할 때였다.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하는 부탁을, 네가 어떻게 감히 거절하겠어, ? 정말 정신 나간 생각이 아닐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너는 느릿하게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네게 활짝 웃어 보였다. 너도 나를 따라 웃었지만, 그 미소에는 어딘가 당황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내가 네 앞에서 이렇게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제대로 미쳤지, 미친 거지. 스스로의 목소리로 머릿속에 울리는 말소리가 또 소름이 끼쳤지만 나는 태연한 가면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러고는 피아노 의자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들어올려 뒤적였다.

 

, 찾았다. 필통. 그러니까, 필통 안의 칼.

 

손 잠깐 줘 볼래?”

 

한 손에 커터칼을 들고 하는 말에도 너는 순순히 복종했다. 아니, 그래서 복종한 것이었을까. 아아, 모르겠다. 이 와중에 그게 무슨 상관이람. 나는 천천히 커터칼의 날을 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젯밤에도 내 팔에 온통 흉을 만들어 놓은 날붙이였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네 새끼손가락에 가져다 대었다. 어제 내 푸르른 우울에서 흐른 붉은 것이, 지금 네게서 흐르는 피와 겹쳐 보였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나.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지만 빠르게 단념하고 칼날을 떼었다. 내가 수십, 수백 번 눌렀던 그 손가락을 타고 붉은 핏줄기가 흐르는 것이 화가 나도록 예뻤다. 나는 천천히 칼을 들어 내 새끼손가락도 깊게 베었다. 통증을 느끼는 것도 잠시, 샘솟듯 흐르는 피를 보자 마음이 오히려 안정되어갔다. 미친 게 분명하다. 미친년. 미쳐도 제대로 미친년.

 

피가 흐르는 두 손가락을 마주 대었다. 검붉은 두 줄기의 혈액이 뒤섞이며 흐르는 것이 잔뜩 얽힌 실타래 같았다. 운명의 붉은 실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정신 나간 생각을 했다. 머릿속은 이미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목소리들로 가득 차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오직 푸른 우울, 그 푸른 우울만이 또 마음 속에서 흐르고 넘치고 있다는 것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손가락이 쓰려 오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마저 미치도록 예뻐서 나는, 나는

 

까슬한 감촉이 입술에 와 닿았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혀를 내어 네 입술을 두드렸다. 살짝 열리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네 입 안을 천천히 맴돌았다. 나란히 난 앞니와 뾰족한 송곳니를 건드리다가, 혀를 깊게 넣어 맨 앞의 어금니 두어 개를 쓸었다. 그러고는 내내 가만히 있던 너의 혀에 나의 혀를 대고, 더 깊게, 더 깊게 얽었다. 눈가를 비집고 우울이 다시 흐를 것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순간의 환희는 그 푸르름마저 누르고 내 온 몸을 잠식했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여전히 맞닿은 새끼손가락에 갑자기 아릿한 통증이 어렸다.

 

입술이 떨어지며 손가락도 함께 떨어졌다. 너도 나도, 서툰 입맞춤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친구지, 그렇지? 너는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웃었다. 짧은 웃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마침내 환희를 잡아먹은 우울과 절망과, 다른 여러 것들이 물결치듯 몰려들어왔다. 나는 칼을 필통에 넣고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음악실을 나왔다. 네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무시했다. 네가 내가 얼마나 미쳤는지 알았다면 그렇게 붙잡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니?

 

친구는, 지랄.”

 

복도를 걸으며 나는 결국 눈가에 흐르는 고통을 거칠게 닦아 내었다. 친구는 무슨. 나는, 나는, 나는 말이야. 차마 생각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는 완전히 미친년이야. 너랑 친구같은 건 아예 하지 못한다는 말이야. 듣지도 못할 네게 중얼이던 나는, 결국 내가 얼마나 미쳤는지 털어놓고 만다.

 

나는 처음부터 너를 지독히도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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