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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HQ

[쿠니카게]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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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미 아키라x카게야마 토비오

여름




우리의 여름은 텅 빈 음악실에서 시작되었다.

 

낡은 그랜드피아노는 짙은 검은색으로 윤이 나고, 붉은 벨벳으로 뚜껑이 장식된 피아노 의자는 앉을 때 마다 작게 삐걱이는 소리를 내었다. 먼지가 살짝 덮인 피아노 뚜껑 위를 후 불면 휘, 하고 흰 먼지바람이 일었다. 퀴퀴하지만 아늑한 먼지 냄새가 났다. 창 밖에는 덩굴 장미가 한가득 예쁘게 피어 있었다. 창문을 열면 바람을 타고 장미향이 아득하게 번졌다. 그러면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고 흰 건반을 들여다보았다. 맨질맨질한 건반에 내 얼굴이 비칠 것만 같던 그 5월에, 달칵이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름은 시작되었다.

 

“….”

 

붉은 입술이 작게 벌어져 짧은 탄성 비슷한 것을 내었다. 나는 그 입술에 순간 홀리듯 정신을 놓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깊은 여름 바다와 같은 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아래로 자리잡은 오똑한 코와, 발그레하게 물든 양 뺨, 부드럽게 흐르는 목 선과 옷깃에 슬쩍 가려진 어깨, 얇은 손목과 마른 무릎에 나는 차례로 시선을 두었다. 나는 그 때 네가 나의 여름이 될 것을 알아차렸다.

 

너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음악실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 했다. 이내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하지 않고 문을 닫으려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나는 조금 다급하게 말을 내었다. 잠깐만. 너는 반쯤 닫힌 문 새로 둥그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네가 아예 문을 닫아버리려고 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입을 뗐다. 조금 큰 목소리였다.

 

같이 피아노 치지 않을래?”

 

너는 얇은 입술을 바르작대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음악실 안에 가득한 여름 안으로 들어오는 너의 걸음마다 흰 물거품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너는 그렇게 내게 다가와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검은 치맛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에 숨이 막혔다. 열린 창으로 드는 장미 향이 진했다. 피아노 칠 줄 알아? 묻는 내 말에 너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괜찮아, 내가 가르쳐 줄게. 목소리에 떨림이 묻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나는 손을 오므려 건반 위에 얹었다.

 

이렇게, 손을 올리는 거야.”

 

으응, 작은 소리로 대답하며 네가 내 양 손 옆에 네 두 손을 올렸다. 서툰 모양새에 나는 살풋 미소를 지으며 네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그렇게 말고, 이렇게. 감싸듯 네 손을 잡으며 모양을 바로 고쳐주었다. 손바닥에 닿는 손이 따뜻했다. 어쩌면 조금은 뜨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여름, 여름이야. 생각하니 심장이 콩콩, 뛰었다. 두근두근, 콩콩. 나는 네 손을 잡은 채로 가볍게 눌렀다. 오른손 엄지부터, , , , , . 다시 왼손 엄지부터, , , , 솔 파.

 

치고 싶은 곡 있어?”

 

묻는 말에 너는 또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잠시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내 다시 네 손 위에 겹친 손으로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 , , 느릿느릿, 연주되는 설렘에서 여름 냄새가 났다. 그렇게 한참을 네 손가락을 누르고, 건반을 누르다가, 파 샵, , , 곡을 끝내었다. 그러나 나는 네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여름의 열기를 손 안에 가두어 놓는 듯 했다.

 

“…노래 좋다. 무슨 곡이야?”

 

이번에는 네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네 손 위에서 미끄럼을 타듯 손을 내려 네 손목을 잡았다. 콩콩, 맥이 뛰는 것이 엄지로 전해졌다. 두근두근, 콩콩. 나는 잔잔히 목소리를 내었다. 여름, 여름이야. 생각하던 것을 입으로 내어 말하니 묘하게 귓가가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이 귀를 가리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큼. 그렇게 말하고 네 손목을 놓았지만 너는 건반 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앞으로도 피아노 가르쳐 줄 수 있어?”

 

네가 또 물었다. 나는 애써 기쁜 투를 숨기며 고개를 나른하게 끄덕였다. 으응, 물론.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너는 건반에서 손을 떼고는 귀 뒤로 긴 머리칼을 넘겼다. 귓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창 밖의 장미는 붉었고, 나는 우리의 이 여름이 길 것을 직감했다.

 

너는 빨리 배웠다. 네가 첫 곡을 내 도움 없이도 느리게나마 완곡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나는 묘하게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 표현하지 않고, 대신 네 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검은 머리칼을 몇 번 만지작대다가 천천히 붉어지는 귀 끝으로 손을 옮겼다. 손 끝에서 굴리듯 천천히 만지다가 이내 손을 내렸다. 네 볼마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쿠니미.”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내 귓가도 조금은 붉어졌으리라 짐작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너는 내가 했던 것처럼 내 머리칼을 살살 만지다가, 이내 귀로 손을 옮겼다. 귀 끝을 만지는 서툰 손길에 나는 울렁이는 속을 참을 수가 없어 눈을 뜨고 말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너의 양 볼에 손을 얹어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카게야마.”

 

얇은 입술은 조금 까칠했다. 나는 그것마저 참으로 너답다는 생각에 입술을 댄 채로 푸스스 웃었다. 간지러워. 다 먹히는 발음으로 네가 말했다. 으응, 알아. 나는 여전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네 입술에서는 여름 맛이 났다. 여전히 창 밖의 장미는 붉었고, 네 눈동자는 바다를 닮았으며, 음악실 안에는 여름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교길에는 놀이터가 하나 있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천천히 걷던 나는 그네에 앉은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너였다. 나는 기분 좋은 복잡함을 안고 네게로 다가갔다. 카게야마. 이름을 부르자 네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 앞으로 가 섰다. 신발에 밟히는 모래는 거칠지 않았다. 나는 꼭 해변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눈 앞에 바다가 있었으니까.

 

나는 잠시 너를 바라보다가 몸을 숙였다. 손을 뻗어 네 볼을 매만졌다. 햇볕을 오래 쬐어 가무잡잡하게 탄 네 얼굴 위의 흰 손이 눈에 띄었다. 그것마저 내게는 여름 냄새 가득한 설렘이었다. 나는 네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며 피어오르는 떨림을 음미했다. 뱃속에서 시작된 그것은 명치께에서 심장을 건드려 박동에 박차를 가하고는, 기도를 타고 올라와 숨을 막히게 했다. 이내 혀뿌리까지 기어올라온 것은 내게 목소리를 내라고 부추겼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타일렀다.

 

네 입술은 당연하게도 여전히 까슬했다. 나는 혀 끝으로 그 사이를 톡톡 두드렸다. 살짝 벌어지는 틈을 타고 네게로 들어간 나는 네 입 안 곳곳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섞이는 타액에서 또, 여름 맛이 났다. 장미가 없는데도 장미 향이 났다. 서툴게 움직이는 네 혀를 감쌌다. 여름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떠올렸다. 붉은 색의, 심장 박동이 빠른 물고기.

 

입술을 떼고 나는 너를 바라보았다. 너와 나는 서툰 입맞춤에 부족해진 숨을 찬찬히 몰아쉬었다. 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를 부추기던 떨림은 이제 잇새로 스미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열어 그것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천천히, 그것이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말을 내었다.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무엇을 말하는 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질문이었지만 너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심장이 뛰었다두근두근, 콩콩. 여름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네 입술을 바라보며 웃었다.

 

모르는 척.”

 

너와 내가 다시 맞닿았다. 다급한 몸짓에 머리칼이 엉키고 몸이 기울었다. 네 등 뒤로는 노을이 번졌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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