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604 카게른 교류회에 가져갔던 글입니다.
*아웃팅 및 학교폭력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Convergence
한없이 종말에 가까운
종말과 좋아한다는 말에는 접점이랄 것이 그다지 없었음에도 나는 그 두 개의 조합이 지독하게 자연스럽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 어울리다 못해 마치 하나의 단어, 혹은 하나의 어구 같았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걸 그럴싸하다고 여겼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건 모두 그 애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그 애 탓이 맞다. 이건 모두 그 애가 초인종을 누른 시점이 하필이면 TV에서 종말을 이야기하던 순간이었고 그 애가 문가에서 나를 마주하자마자 바로 내뱉은 말이 하필이면 좋아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뉴스 소리와 그 애의 목소리가 잔뜩 엉키고 더해져 어지럼증이 일었다. 낡은 카세트테이프에서 나는 늘어지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바로 귀 옆에 대고 틀어놓은 것만 같았다. 형식적인 인사도 입에 발린 사과도 뱉지 않은 것은 온전히 그 애다웠지만 실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좋아해, 한 마디만 그렇게 툭. 뉴스에서는 다가오는 소행성을 찍은 자료화면을 내보였고 나는 그 둘 중 무엇도 현실감이 없었으므로 그걸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고 제멋대로인 점이 닮았다고, 무엇보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뭐, 그 애를 거실 소파에 앉혀놓고 다급히 뭐든 대접할 거리를 찾으며 드는 생각은 기실 그것보다는 좀 더 정리되지 못한 무언가의 조각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 애와 재회하자마자 그런 기이한 조합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음은 사실이다.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거실의 작은 소파에 몸을 얹은 그 애는 내가 내어온 차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 차도 마셨냐. 물음이 아닌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건 그 애의 선언이었다. 너는 변했구나, 변한 것만 같구나, 하는 그런 속뜻을 품은 채였다. 나는 순간 오싹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지만 그 애를 위해서라면 변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애를 보는 것은 거의 6년만의 일이었지만 그 애는 하나도 변한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내가 변한 것이 그 애를 실망시킬까 두려워 황급히 손에 밴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슬그머니 변명을 내었다. 아니 뭐, 누가 선물로 줘서. 말끝이 말끔하지 못한 것은 나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단지 그 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애를 실망시키면 또 어디론가 잠적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그러니까, 그 애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으므로.
그 애는 잠자코 차를 홀짝이며 뉴스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나는 내심 그 애가 나를 봐줄 것을, 나에게 뭐든 말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그 애는 그저 침착을 잃어가는 앵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아니, 정말 듣고 있는 것이 맞나? 단지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그 애의 옆에 앉아 그 애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새카만 머리칼과 푸른 밤의 빛깔을 한 눈동자는 여전했다. 예전보다는 조금 창백하고 지친 인상이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문득 그 애도 변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에 어깨를 조금 파득였다. 그 애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나는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6년 전의 그 애와 나는 어떘는지, 그 애와 내가 어떻게 대화했는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단지 아득하고 아주 먼 일 같았다. 먼 일이 맞기는 하지만, 글쎄, 못 해도 백 년은 지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 애가 돌아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어색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둥그런 뒤통수에서 흘러내려오는 목선의 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나는 결국 스스로에게 묻고 말았다. 아아, 그러니까 그 애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어쩌다 멸망의 근방으로 귀환했을까.
❇ ❇ ❇
그 애를 처음으로 본 것은 고교 진학 후 처음 맞는 여름방학의 일이었다. 해가 유독 뜨거웠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리쬐는 뙤약볕과 웅웅 울리는 매미 울음소리가 영락없이 여름이었지만 그 애만큼은 겨울에 있었다. 그것도 가장 깊은 겨울, 이를테면 동지와 같은 날에서 그 애는 숨을 쉬었다. 나는 먹던 아이스크림에서 냉기가 풍기는 줄로만 알았지만 그 애와 눈을 마주친 그 순간에 깨달았다. 냉기를 품은 것은 그 애였다. 도무지 적응할 수 없을 만치 차가운 기운을 온몸으로 표출하던 그 애의 그 눈, 그 푸른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정말 겨울만 같아서 나는 황급히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주택가 사이의 제법 너른 길을 두고 옆으로 난 막다른 골목길에 반쯤 몸을 담근 모습으로, 그렇게 냉정하기 짝이 없는 음지에 발을 디딘 채로 나를 보는 그 눈짓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다만 눈을 돌리고 애써 마음마저 돌렸을 따름이었다.
그 애가 우리 동네에 새로 이사를 온 애라는 건 개학을 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원체 규모가 자그마해 인원 변동이 잦지 않은 학교에 온 전학생은 당연히 전 학년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래봤자 몇 되지도 않는 애들이었지만, 어쨌든 모두 그 애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나도 실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옆 반에 전학생 왔대, 하고 수업 중 몰래 소곤댄 친구는 수학 선생님이 던진 분필에 제대로 이마를 얻어맞았고 나는 그 모습에 킥킥대면서도 내심 마음이 들떴다. 어떤 애일까, 어쩌다가 이 시골 마을에 왔을까, 이것저것 생기는 질문들은 바로 답변을 내기 어려운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바로 답을 얻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것은 애초에 갖지 않았으므로 그것들이 단순한 궁금증으로 남을 수도 있고, 혹은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소문 같은 것으로 답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 있었다. 한 순간의 호기심으로 남을 것이라는 쪽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기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그 애가 ‘그 애’인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쉬는 시간을 틈타 전학생을 보려고 몰려온 애들로 옆 반 복도가 혼잡했다.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창문에 코를 바싹 붙였다. 제법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애가 하나 있는 것을 보던 나는 이내 파드득 놀라며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그 애, 그러니까 여름의 골목에서 마주친 그 애였다.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가득 안고 날선 눈빛을 한 채였다. 나는 조금 섬뜩한 마음이 들어 몸을 파득거리고는 교실로 발길을 돌렸다. 왠지 그 애랑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아직 그 애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다만 아주 추운 곳에 있는 것만 같은 애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래도 왠지 그 애에게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오후에 나는 그 애를 다시 마주쳤다. 우리 집은 조금 먼 편이었다. 친구들과 하교를 하다 보면 마지막엔 혼자 가게 될 만한 그런 거리였다. 그 날도 애들과 헤어져서는 혼자 느릿하게 집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앞에 낯설지만 어째 조금은 익숙한 인영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걸음이 나도 모르게 멎어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면 그건 그 애였으니까. 여전히 혼자 겨울에 사는, 홀로 추위 속에 사는 그 애. 나는 그 날 그 애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멀리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날 하루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 애의 집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와 같은 방향인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늘 본의 아니게 그 애의 뒤를 따르다가 집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건 사실 제법 스트레스가 되었다. 가까워지면 안 될 것 같은 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애를 매일 볼 수밖에 없다니. 그 애가 발을 디뎠던 땅에 발자욱을 겹치며 걸을 수밖에 없다니. 나는 그게 이래저래 혼란스럽고 은근히 짜증도 나서 괜히 길가의 돌멩이 따위를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 애도 나도 당장 이사를 갈 일은 없었고, 사실 이런 정도의 이유로 이사를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는 했다. 그렇게 그 애와 나의 기묘한 동행은 슬슬 날씨가 쌀쌀해질 때 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그 애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이 딱 그 즈음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 애가 앞에, 내가 뒤에 있는 채로 하교를 하던 중이었는데, 느닷없이 그 애가 평소의 경로에서 이탈했다. 날은 춥고 해는 짧아져 더욱 어둑하고 차가운 골목 앞에 멈춰서더니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골목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막다른 끝 앞에 그 애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둑어둑 그늘이 진 곳인 터라 그 애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애의 등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 애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눈치 챘다. 희미하게 울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그 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엉켜서 흘러나왔다. 쉬이, 착하지, 착하지- 그 애가 열심히 고양이를 달래 보려는 것 같았지만 고양이는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던 듯 사납게 한 번 울고는 그 애를 지나쳐 내 쪽으로 뛰쳐나왔다. 그 애의 시선이 고양이의 뒤꽁무니를 쫓다 나에게로 와서 멎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고운 표정은 아닐 것 같았다. 그 애가 서서히 밝은 곳으로 걸어나오자 그 애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냉기가 가득 서린 눈빛이었지만 왠지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무언가 그 애의 현실감 있는 모습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나는 나를 그대로 지나쳐 가버리려고 하는 그 애에게 말을 건내었다.
“안녕?”
그 애는 뭔가 이상한 걸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게 사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해해주기로 했다. 어쩌다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고 같은 길로 하교하면서도 한 마디도 나눠보지 않은 사이였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나는 한참 대꾸 없이 나를 빤히 보기만 하는 그 애를 향해 팔을 뻗었다. 뭐 악수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그 때의 나는 많이 당황했고 조금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므로 그런 필요 이상의 우스운 짓도 할만 했다. 그 애는 내 손을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꽤나 민망해져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 애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손을 바라보더니 마침내 슬쩍 마주 잡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악수를 하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야?”
상황에 맞는 질문인지 아닌지도 분간하지 못하고 아무런 말이나 내뱉은 내게 그 애는 떨떠름한 얼굴을 해 보이다가 살살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토비오.
이름을 듣는 순간 발끝부터 전기 자극이 찌릿찌릿 올라오는 것만 같은 환각이 일었다. 나는 어렵게 입을 떼 내 이름도 밝혔다.
“나는 히나타 쇼요. 옆 반이지?”
하굣길엔 많이 봤는데, 대화는 처음이네. 그치? 요즘 뭐 날도 추워서 딱히 이렇게 밖에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아무런 말이나 쏟아내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어색했다. 이상하게 긴장감이 뱃속을 가득 채워 간지럽혔다. 사실 간지러운 정도도 아니었다. 뱃속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긁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고양이 좋아해?”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하겠다. 그저 그 애의 얼음장 같은 태도가 그 애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게 내심 반가웠던 것 같다. 그 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동생이 고양이를 기르고 싶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 애의 얼굴에 동생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나보다 키도 한참 큰 동갑내기 고교생을 두고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조금…귀엽기는 했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그 애에게 아까보다 훨 자연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입이 벌어지고 또 요란하게 이런저런 소리들이 떨구어졌다.
“내 동생도 고양이 좋아하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면 고양이를 아주 많이 기르는 게 꿈이래. 너는 고양이 안 길러? 좋아하니까 기르려나? 어지럽게 와르르 쏟아지는 낱말들의 사이로 그 애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 길러.”
“왜?”
“알러지가 있어서.”
그 애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정말 아쉽다는 심정이 가득 담긴 표정이어서 나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타입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것이 또 이상하게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뒷목이 홧홧해졌다. 그걸 숨기려고 그 애와 같이 걷던 길에 또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내가 그 애에 대해 하고있던 생각들과 느낀 점들이 대다수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니 속이 후련했다. 집에 들어와서야 내가 무슨 쓸데없는 말을 했는지가 떠올라 이불을 좀 차긴 했지만.
그 이후로 그 애와 나는 하굣길에 서로를 마주치면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 애는 경계심은 심했지만 의외로 허술했고 눈치도 좀 없었으며 순진했다. 분명 어딘가 날이 서있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철저하고 꼼꼼한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그 애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꿈을 꾸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그 꿈은 정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온통 빙빙 도는 세상에서 그 애의 얼굴만이 깜박이며 제 존재를 드러내고 그 애가 한 번도 지은 적이 없는 웃음이 둥둥 떠다니는 꿈이었다.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했고 더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다. 한두 번 꾼 꿈이라면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겠지만 그 꿈은 거의 매일 밤 나를 찾아왔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심장 박동이 빠르게 느껴지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새벽녘에 눈을 뜨면 그 애가 아른거렸고 때로는 정말 현실처럼 선명하기도 했다. 나는 그게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애를 똑바로 마주보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 애를 피하고 싶다가도 보고 싶어졌다. 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꿈의 진실을 깨달은 것은 꿈을 꾼 지 한 달 정도 되던 밤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어지럽게 내 주위를 유영하던 그 애의 모습이 한 곳에 고정되더니 온전한 형체가 되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지도, 그렇다고 마주 다가서지도 못한 채로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그 애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 애가 꿈에서만 짓는 해사한 미소를 보였다.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달큰함이 뚝뚝 떨어지는 말이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아아, 그건, 그건.
“좋아해, 히나타.”
정말 예상 밖으로, 고백이었다.
그 애가 내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밤중에 깨어나 숨을 몰아쉬며 점점 달아오르는 볼에 손등을 대어 식히려 애를 쓰던 참에, 방 한쪽에 걸린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때 알 수 있었다. 영락없이 짝사랑에 빠져버렸다고, 온통 그 애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견딜 수 없어진 것이라고. 손이 파들거렸다. 심호흡을 깊게 해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밤을 통째로 지새우며 고민에 빠졌다. 그 애랑 친구가 아닌 사이가 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 애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내가 참지 못하고 고백이라도 해버리면 어떡하지. 두근대는 심장은 다음 날이 되도록 가라앉지 않았고 나는 결국 그대로 등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 애와 하굣길에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애를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에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를 썼다. 그 애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애가 짓는 표정들이, 그 애가 하는 손짓들이 어지러웠다. 감정을 자각한 이상 그걸 부정하거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게 그냥 사그라들기를 기다리거나, 그 애에게 고백을 하는 것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선택해야 했다. 도망가고 싶지는 않았다. 참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 애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결국 입을 꾹 다물고 그 감정이 죽어버리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늘 생각대로만 통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애는 마침내 내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사실 그 애가 눈치를 챘다는 건 나와 그 애를 아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눈치를 챘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 애는 무얼 그렇게 숨기냐고 느닷없이 물어왔고 이어서 작은 말다툼이 일었다. 네가 나에 대한 모든 걸 알 필요는 없잖아, 말하자 그 애는 눈가를 찌푸리며 이미 내 비밀이 저와 관련된 것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반 애들이 나랑 친하냐며 느닷없이 시비조로 말을 걸더니 낄낄대는 웃음만 남기고 사라졌다고, 그리고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것에 못내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더더욱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당장이라도 뻥 터져버릴 것 같이 마음을 가득 채운 감정을 조금이라도 흘려보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정말, 마음은 이성만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좋아해, 카게야마.”
내가 너를 좋아해, 좋아한다고.
마침내 터져 나왔다. 홧김에, 거침없이, 재단도 되지 않은 상태로 터져 나왔다. 그 애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뒷걸음질을 치던 그 애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몸을 돌려 뛰어가버렸다. 나는 그 애를 잡지 않았다. 잡지 못했다. 잡을 자격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을 감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는 일 뿐이었다.
학교에 일주일 결석을 한 그 애는 결국 다시 전학을 갔다.
모든 것이 끔찍하기 짝이 없었던 계절이었다.
❇ ❇ ❇
과거에서 정신을 끄집어내 지금 내 옆에 앉은 그 애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 애는 여전히 뉴스만 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조바심이 났다. 그 애가 왜 그렇게 잠적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무엇보다 그 애가 문가에 발을 딛자마자 했던 그 말, 그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유일했다. 뉴스에서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여섯 시간 가량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애를 나지막이 불렀다.
“카게야마.”
그 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6년 만에 돌아온 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와 세상의 종말을 맞게 생겼을 때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애의 손을 붙들었다. 카게야마, 뭐라도 말 좀 해 봐. 어디에 있었던 거야? 묻는 말에 그 애는 고개를 돌려 내게로 시선을 맞췄다. 천천히 입이 열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좀, 그러니까.”
그 애가 무릎 위에 얹힌 두 손을 꿈질거렸다. 망설이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무서워서, 도망쳤어.”
또 한참 손을 꼼지락대더니 다시 말을 꺼내었다. 나는 그 애 쪽으로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사실, 애초에 시작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서, 아웃팅을 당했어. 사귀던 애랑도 헤어지고, 전교에 소문이 퍼져서 어쩔 수 없이 멀리 이사를 온 건데, 네가 고백…했던 것 때문에 다시 그런 일이 생길까봐 두려웠어.
“그리고 사실 제일 무서운 건, 말이지.”
네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볼 것 같아서, 나 때문에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까…도무지 거기 있을 수가 없었어.
천천히 이어가는 말을 들으며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문득 그 애가 너무 안쓰러워졌다. 양 팔로 그 애를 잡아끌어 품 안에 안았다. 다시는 떠나지 못하게, 다시는 그렇게 혼자 힘든 일을 감당하려 애쓰지 못하게 더더욱 세게 안았다. 그 애는 울지도 웃지도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게 더 마음이 아프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그 애를 놓지 않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애의 손이 내 등을 살짝 마주 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다가 떨어지자마자 그 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답, 안 해줄 거야?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무슨, 대답? 그러자 그 애의 귓가가 발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내가, 아까 했던 말.”
그 말,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입을 헤 벌리고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가 그렇게 부끄럼을 타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문득 그 애가 변한 것 같았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실은 그런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저 눈을 맞추고 그 애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 애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단 말을, 달콤한 말을 흘려내었다.
“좋아해, 좋아해 히나타.”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어.
그리고 아직도, 좋아해.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애의 좋아한다는 말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어지럽게 흩어졌다가 다시 똘똘 뭉쳐 덩어리졌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뉴스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 애를 제외하고는 모두 흐리게 뭉개졌다. 세상에 오직 그 애만, 딱 그 애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나의 세상이 그 애가 전부였던 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애의 파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손을 들어 그 애의 뒤통수를 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에서는 피 맛이 조금 났다. 숨이 섞이고 타액이 오가는 중에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애가 내 목 뒤에 팔을 감았다. 더욱 깊이 입을 맞추었다. 손으로 소파를 더듬어 리모컨을 찾고 TV를 껐다. 소음이 온전히 죽었다. 나는 그 애의 등과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생각했다. 세상이 끝으로 치닫는 날에, 그 애와 함께 있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내 세상의 끝은 결국 그 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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