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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HQ

[오이카게] 절망고문


*연령반전, 이복형제 소재.



절망고문





그-카게야마 토비오는 요즘 절망에 대해 생각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나와 관계없는 남의 사정에 귀를 기울일 만큼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나는 더 이상 남이 아니고, 심지어 지금은 같은 지붕 아래서 단둘이 지내고 있으므로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 네 살이나 위인 대학생인데다가 만난 지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은 사람이니 편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가 쭈뼛쭈뼛 말을 걸어오는 걸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새어머니는 그가 원체 말도 많지 않고 낯도 제법 가리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내게 애써 그렇게 접근해오는 것을 보면 그도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거다. 어쩌면 내가 그보다 어린 고교생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고교 생활을 했으니 지금의 내가 마냥 어린애는 아니라는 걸 빤히 알겠지만, 그래도 그는 가끔 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양 대한다는 뜻이다. 물론 내가 나서서 뭘 하지 않아도 되니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야 있지만 기분은 영 살지 않는다. 그의 눈에 자신은 어른이지만 나는 한낱 꼬맹이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니 말이다.


그게 일 번이다. 내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 일 번.


살면서 누군가를 이토록 미워해본 적이 없다. 유치하게 이유까지 꼬박꼬박 생각할 만큼 싫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내 속내를 그가 안다면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지독하게 무디고 답답한 사람이라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 볼만한 눈치는 없다. 그러면 나는 아주 자유롭게 증오한다. 그 증오를 막을 수 있는 건 나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다. 그저 자유로이, 끊임없이 증오하고 또 증오하고. 그러면서 또 자기 합리화를 한다. 아무리 그 마음이 턱없이 거대하더라도 아무도 해치지 않는 증오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틀린 말은 아니나 언제나 가슴 한켠에서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죄책감을 막아낼 만큼의 힘을 가진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죄책감이라는 녀석은 꽤나 얄팍해서 굳이 막지 않아도 힘을 쓰지 못한다. 언젠가 그게 쌓이고 또 쌓여서 두툼한 형태를 갖게 되더라도 잘못될 것은 하나도 없다. 점점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오래된 칼날이 녹슬고 뭉툭해져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미워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단기간이지만 그와 단둘이 지내게 된 것은 모두 내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의 결혼 때문이다. 자식이 있는 이들끼리의 재혼이었고 둘 모두 나이도 적지 않았기에 신혼여행은커녕 결혼식도 생략하려던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변수가 되었다. 그는 몇 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을 건네며 멀지 않은 곳이라도 여행 정도는 다녀오시라 제안했고,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결국 그걸 받아들였다. 나는 사실 그것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리숙하고 단순한 주제에 그렇게 어른처럼 행동하는 모양새가 불편했다. 마음 한 구석에 돌부리가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을 하다 보면 꼭 걸려 걸음을 휘청이게 되는. 그럼 방법은 두 가지다. 그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지든지, 아예 피해버리든지. 내가 고른 건 후자였다. 나는 그를 아주 조금만 생각하기로 했다. 아주 조금만.


그러나 삶이 늘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에게 별 신경을 쓰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생활하게 되니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둘 모두 여름 방학을 맞았고, 창밖엔 찌는 더위가 제 몸을 더욱 부풀리고 있어서 도무지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 그러면 에어컨이 있는 거실에 나와 TV를 보거나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 것이 일과의 대부분이 되고 마는데, 문제는 그도 꼭 거실에 나와서 뭔가를 한다는 거다. 당연히 그도 이 찜통더위를 에어컨 없이 버티고 싶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아주 조금만 하기로 마음을 먹은 내 입장에선 그가 영 거슬릴 따름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벌써 내 눈 밖에 났고,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가까워질 것 같지는 않지만, 내 사정과는 관계없이 앞으로 주욱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 하나하나 생각해볼수록 기분이 가라앉는다. 실은 끔찍하다. 한두 번 보고 말 사람이라면 되려 아무렇지 않게 먼저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가벼운 농담을 던져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노력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 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런 것들이 어려워지는 거다. 그 생각만 하면 괜히 세상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듯 현기증이 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다.


“오이카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로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아 찬바람을 쐬는데 문득 목소리가 울린다. 소파의 반대쪽 끝에 앉아있는 그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집엔 나와 그, 딱 두 명밖에 없으니. 괜히 심사가 뒤틀린다. 마음에 도통 들지 않는다. 생각을 방해당해 기분이 상한 것도 있지만, 그저 그의 존재 그 자체가 나에게는 어렵고 때론 귀찮다. 사실 조금 더 고민하다 보면 그게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감정인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를 생각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그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싫으니까. 말끝까지 온전히 자취를 감춘 그의 부름은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거기에 대고 똑바로 대답을 해주는 대신 나는 짤막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을 곁들인 말대꾸를 입 밖으로 낸다. 단어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뱉듯 토해낸다.


“이제 당신…그쪽도 오이카와예요.”


차갑게 숨을 얻은 말은 순식간에 나와 그 사이의 공간을 지나갔지만 어색해진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본다. 나는 그게 영 못마땅하다. 따라서 괜히 비틀린 어조로 말을 토한다. 


“알잖아요, 우리 이제 형제라는 거.”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굴린다. 우습다. 감정을 숨기는 데에 서툰 사람이다. 그런 주제에 형 노릇이며 어른 행세를 하고 지내는 것이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굳이 그의 앞에서 펼쳐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니, 나는 찬찬히 생각하는 동시에 날을 세운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한다. 그러나 그의 그 깊고 검푸른 눈은, 사실 쳐다볼 용기가 별로 나지 않는다. 숨겨질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 헤엄치고 있을 것이 뻔하다. 간혹 그 어이없을 정도의 정직함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문득거기에 휘말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래서는 안 된다. 사실 늘 안 되지만, 지금은 더더욱 안 된다.


“그러니까 아직은, 서류 정리랑 재혼 절차도 덜 끝났고….”


머뭇거리다가 내어놓는 건 형편없는 변명이다. 헛웃음이 터질 뻔 했다. 그런 눈을 하고 그런 말을 하면 참, 설득력 있겠네. 속으로 비꼬듯 중얼거려 본다. 그는 그 복잡한 법적 절차들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 자란 어른인 척 구는 그 뻔뻔함을 가진 이상 정말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나를 동생으로 여길 수 있을 테지만, 그는 나와 형제지간이 되는 것을 탐탁찮게 생각한다. 차라리 싫다고 단칼에 잘라 내뱉는 쪽이 기분이 덜 상했을 거다. 사실 무엇보다 나를 화나게 하는 건 그가 나를 기만했다는 거다. 말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의 눈에 한낱 어린애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강제로 입증당하니 짜증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다.


“나랑 형제 하기 싫어요?”


부러 웃으며, 농담처럼 건넨다. 제 감정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또 애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니, 나도 그가 하는 것처럼 다 큰 연기를 해본다. 그는 그런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내가 눈을 마주치려 하자 시선을 피한다. 말해줘요, 진짜 그런 거예요? 부러 달래듯 나긋하고 상냥하게 묻는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여유를 서서히 잃게 만드는 것에서 묘한 쾌감까지 느낀다. 전세 역전이다. 늘 나보다 위에 있는 것 마냥 굴던 그가 쩔쩔매게 된 것이 더없이 즐겁다. 다시 한 번, 나랑 형제 하는 거 싫냐고요, 하고 묻는다. 


“아니, 뭐…. 그렇다기보단.”


이번엔 더듬더듬 답변이 흘러나온다. 그는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다. 푸른 홍채가 소용돌이를 치는 것 같다.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하는지, 아니 말을 덧붙여도 괜찮은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내 눈만 피하는 모습이 볼만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난, 형제 하기 싫은데.”


딱 한 마디 말만 내어 놓고서.


그 후로 한참 고요하다.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 정도는 그도 안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도 잘 안다. 나는 그게 또 좀 비참하다. 뻔히 알면서 또 모르는 척을 하는 모습이 지독하게 싫다. 혹은 어른스럽게 그런 걸 드러내지 않고서 참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싫다. 고작 네 살 차이, 그러나 나는 아이고 그는 어른. 또 그 논리로 돌아가는 거다. 자기는 어른이니까, 나보다 잘 절제하고 통제할 줄 안다고, 그래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체 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내가 보기엔 나도 그도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까 그가 제 나이를 핑계로 쓸데없는 부담감에 책임감까지 모조리 떠안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소리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말없이 생각만 떠돌던 공허한 정적을 억지로 깬다. 그는 조금 숙여졌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문득 소파 저편에 앉은 그가 턱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우습게도 나는 조금 섬뜩해졌고 결국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가 앉는다. 가까이 다가온 나를 흘긋 본 그는 기분 나쁠 정도로 빠르게 시선을 피한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뻔뻔하게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전에, 생각한다던 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눈 안에서 온갖 감정이 꿈틀댄다. 독자적으로 살아있는 생물이라도 되는 듯이 숨을 토한다. 나는 문득 허무맹랑한 생각을 한다. 저 복잡한 것들이 언젠가 그를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유치하고 비현실적이지만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에만큼은 그런 생각이 타당하게 여겨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피한다. 그도 곧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제 발끝만 내려다본다. 무릎에 얹은 손을 꿈질대다가 입을 연다. 그러니까, 요즘 생각에 절망이란 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을 때보다 무언가 주어졌을 때 더욱 커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애초에 기대하지 않잖아. 하지만 뭔가 주어진 게 있다면 변수가 많아지지. 내가 가진 게 소중해진 순간에 그걸 잃을 수도 있으니까. 


일전에 언급했듯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도통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저 예의상 물은 질문에 그는 열심히 답을 한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미묘한 후회 비슷한 것을 느낀다. 단어를 조심스레 골라가며 더듬더듬 답하는 모습에서는 기쁨이나 보람을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풀이 죽은 것 같은 모습이다. 조금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 되지만 꾹 참는다. 이런 때에 화까지 내서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의 다음 말을 차분히 기다린다. 망설임 끝에 그가 결국 내는 문장은 심장을 쿵 내려앉게 만든다.


“…그 주어진 무언가가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나는 또 살짝 화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꾸 그의 말 뒤편에 숨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그가 그렇게 말 뒤에 의도를 가지고 다른 의미를 숨겨놓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똑똑히 알고 있지만 감정이 늘 이성으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귓가에 메아리처럼 목소리가 울린다. 그는 지금 절망할까, 더없이 절망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절망하는 이유가 그 무언가 잘못된 것 때문일까. 그가 지금 생각할만한 잘못된 것은 단 하나다. 나 또한 명백히 알고 있는 그것 하나다. 그 생각을 하니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지만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리를 붙든다. 애써 가볍게 묻는다. 억지로 미소까지 지어가며 그를 본다.


“그래서, 그쪽은 지금 절망해요?”


짤막한 물음에 그는 한참 말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절대 솔직하게, 곧이곧대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할 테다. 그러면 그를 향한 증오가 다시 들끓기 시작한다. 사고가 한 방향으로 굳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만 나는 제어할 수 없이 그를 증오하는 쪽으로 생각의 길을 걷는다. 잘못된 뭔가가 주어졌을 때 더욱 절망한다는 그 말은 우습지도 않다. 워낙 말주변이 없는 그이기에 그 짧은 말 한 마디를 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의 준비가 필요했을 법 한데, 그런 정성으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는 게 도무지 견디기 힘들다. 늘 자기 혼자 괜찮은 척을 하려 애쓰는 게 지긋지긋하다.


이 끔찍한 관계에 묶여 있는 것은 그 혼자가 아니므로.


우리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곧 네 형제가 될 사람이라며 내게 그를 소개시키던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부모는 우리가 서로를 피붙이처럼 아끼기를 바랐지만 우리는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그게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을 예감했다. 어쩌다 시선이 부딪히면 도무지 피할 수 없었고 실수로라도 손끝이 스치면 온몸이 저릿했다. 그걸 보통은 사랑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건 일종의 저주였다. 피가 섞이지 않았으나 마음은 섞인 형제라는 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적 드문 골목에서 다급하게 입술을 마주 대던 날들은 소중한 동시에 쓸데없었다. 곧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다시는 지금처럼 사랑할 수 없다고 각각 되뇌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결국 우리는 정말, 형제가 되었다.


밀회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 담긴 죄책감은 그걸 도무지 용납하지 못했다. 우리는 부모님이 여행을 떠나던 날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다가 헤어졌고 형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났다. 아무도 그 사랑으로 가득했던 날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암묵적인 규칙이 정해졌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거기까진 당연한 거였다. 아무리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더라도 형제는 형제니까. 그러나 그가 형 노릇을 하려고 애쓸 때마다 이상하게 화가 났다. 속이 타들어갔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짧은 시간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관계는 온전한 연인에서 온전한 형제로 바뀌어야 했지만 지금껏 그러지 못했다. 나 때문이었다. 나는 연인으로 지냈던 그 시간들을 도저히 잃을 수 없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야말로, 첫사랑이었고.


미묘한 공기와 선연한 증오 가운데서 나는 괜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하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고 싶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화가 치밀었다. 헤어지던 날에 우리는 되도록 연인이었던 때를 다시 떠올리지 않기로,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언급하지 않도록 약속했던 것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은근히 그 때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비꼬듯 말을 하면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조금, 아주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유치하고 어리석은 짓인 줄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럴 뿐이다. 다시 그에게 입을 맞출 수도, 그를 품에 꼭 끌어안을 수도 없는 비참한 나날들이 앞으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을 알기에 나는 끝없는 절망으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내 옆의 그를 바라본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것 외에는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이지만, 내 눈에는 그의 얼굴에 엉망으로 묻은 절망과 후회가 보인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절망스럽고 뭐가 그렇게 후회가 돼, 다짜고짜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고개를 숙인다. 눈앞이 조금 뿌옇다.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손등으로 눌러 닦는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잠자코 앉아 느릿하게 숨을 쉰다. 나는 아예 오열하고 싶은 것을 막아내며 눈을 깜박인다. 이 이상 울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나를 외면하는 그가 철저하게 증오스러워서.


그리고 그런 그를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