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
소멸에 대한 의지만이 난무하는 무기력의 여름이다. 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반팔 셔츠를 입은 채 선풍기 앞에 앉는다. 낡은 선풍기는 날개가 돌아갈 때마다 어딘가에 턱턱 걸리는 소리를 낸다. 어긋난 부분이 있나 싶은 생각에 안쪽을 들여다 볼 생각을 잠시 하지만 이내 접는다. 날선 시선은 곧 천장 어드메를 훑는다. 우수수 빗물 같은 것이 쏟아지는 환영이 어른거린다. 담수가 아닌 듯하다. 나는 그러면 그 위에 바다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한다. 푸른 기 가득한 에메랄드빛의 바다는 아니다. 그건 짙은 남색 혹은 검은색의 심해에 가깝다. 그건 나의 바다다. 나는 헛웃음을 조금 웃는다.
쓴맛보다 단맛이 강한 우울이 혈관을 타고 유출된다. 구조 작업도 방제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문장들이 심해를 누빈다. 독이 든 것도 모르고 달큰한 물을 날름날름 삼키어 걸러내다가 곧 모두 그 독한 것에 취해 물 위로 둥둥. 그러면 나는 그물을 가져다가 그런 것들을 온통 그러모은다. 미약한 파닥임도 없이 숨만 쌕쌕 내쉬는 낱말들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음절들을 만들고는 그것들을 다시 파훼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면 거진 뿌듯하나 내심 절망적이다. 그 애에게 닿을 지도 모르는 말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코끝이 매워 코를 찡긋인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눈을 감는다. 후회나 미련 같은 것은 주로 눈물을 타고 흐르기 마련이니 내게서 흘러나올 것은 없다. 울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울음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은 제법 오래된 일이다.
그 일이 있던 날으로 기억이 회귀한다. 열기에 찬 코트가 식어내린다. 공이 떨어지는 것을 따라가던 눈길을 그 애에게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건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어서,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자석 같은 것이어서.
망연자실한 얼굴인가, 절망한 얼굴인가, 모든 것을 잃은 얼굴인가, 충격을 받은 얼굴인가, 아니 애초에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담은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은 눈이 푸르다. 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르렀다.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푸른 것이 아득했다. 의식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 애가 코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에도 그러했다. 운동화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도, 공이 구르는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애의 뒷모습만 덩그러니. 온전히 홀로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생각이 났다. 새카만 암흑으로 뒤덮인 눈앞에 자꾸 그 애가 그려졌다. 양 뺨이 축축했다. 베갯잇을 적시는 게 눈물이 아니라 핏물만 같아서 나는 자꾸 눈을 부볐다. 멎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철저히 마지막이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그 애는 어떨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나는 그 애가 싫다.
혹은 그 애가 좋다.
다시 눈을 뜬다. 문득 중교 졸업 앨범을 꺼낸다. 책꽂이의 맨 밑 칸에 꽂혀 있다. 남색 표지의 끝부분이 조금 벗겨졌다. 손끝으로 더듬어 수없이 펼쳐 본 페이지를 또 연다. 시선이 그 애의 사진 근처로 떨어진다. 싸구려 애정의 위로 엷은 증오가 일렁인다. 해수에 칠이 벗겨져 녹물이 뚝뚝 떨어진다. 사진 속의 그 애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마냥 무뚝뚝한 얼굴이다. 기실 그 애가 신경 쓰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애가 신경 쓰는 건 오직 그 끔찍한 사람뿐이다. 그 애를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그저 간혹 그 애와 말을 섞고 혀를 섞고 숨을 섞는, 그런 사람. 그를 향한 나의 증오는 좀 더 두툼하고 맹렬해서 차마 모른 체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새카만 천으로 둘둘 감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기고 시치미를 뗀다.
제가 어떻게 선배한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얼마나 선배를 존경하는데.
철저히 계산된 단어들을 차례로 내뱉을 필요조차 없다. 경계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도 나를 경계하지 않고 나도 그를 경계하지 않는다. 그는 그 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나는 그가 그 애를 사랑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머물 뿐이다. 그 애는 아마 계속 그를 쫓을 것이고 그는 그런 그 애를 적당히 가지고 놀다 귀찮아질 때쯤 놓아버릴 것이다. 그 애는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걸 생각하다 보면 머리가 아프다. 그 애는 도무지 내가 예상하는 대로 살지를 않는다. 나는 그게 못마땅하지만 만족스럽다. 그 애다운 일이라서. 내가 바꿀 수 없는 애라는 걸 스스로 아주 잘 증명해주어서 나는 늘 그게 흡족하다. 내가 그래서 널 싫어한 게 아닐까, 혹은 좋아한 게 아닐까. 사진을 들여다보며 슬쩍 말을 걸어 보아도 대답이 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또 눈을 감는다. 그러나 금방 뜬다. 시선이 또 사진을 스친다.
나는 문득 그 애가 보고 싶다. 손을 뻗는다. 사진 속 그 애의 입매를 매만지다가 더 위로 손가락을 뻗는다. 모서리를 세게 잡는다. 종이가 들린다. 나는 거침없이 손을 끌어당긴다. 부욱, 두터운 종이가 찢어진다. 나는 내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눈가를 찌푸린다.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하지만 그 애의 얼굴은 그대로다. 조금 화가 난다. 이상하게 화가 난다. 푸르른 홍채에 부러 눈을 맞춘다. 저게 바다의 색인가, 바다가 원래 저런 색이던가. 생각하니 속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나는 다른 한 손을 가져다가 종이를 잡는다. 양 손으로 각기 다른 방향의 힘을 주면 그건 금방 찢어지고 말 것이다. 고민 없이 손에 힘을 준다. 과하게 부들거릴 만큼 세게 힘을 준다. 종이가 떨린다. 그 애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종이를 내던진다.
멀쩡한 그 애의 얼굴이 천장을 보는 것 같다. 달콤하게 오염된 해수가 그 애의 얼굴에도 닿을까. 나는 예측할 수 없다. 매섭게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숨을 몰아쉰다. 거칠게 호흡이 드나든다. 차마 하지 못할 말을 머릿속에서 조합한다. 의미 없던 소리들이 조립되어 의미를 가진 낱말이 되고 결국에는 하나의 말이 된다. 하나의 문장이 된다. 부피를 늘려 머릿속을 잠식한다.
뺨이 젖어든다. 그게 싫다.
혹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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