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소재(자살 암시) 주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무한의 연구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소문은 이미 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건 무모한 짓이지, 안 될 일이야. 보수적인 이들은 등을 돌린 지 오래였고, 다소 급진적인 이들마저 그에게 우려를 표했다. 카게야마, 나는 자네가 그 연구에서 손을 떼기 바라네. 그를 걱정하는 말들은 그가 고개를 가로저을수록 아득히 멀어졌고 이내 완전히 멎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가득 채운 것은 그를 향한 비난들이었다. 저렇게 독선적이어서야, 원. 우리가 괜히 걱정해 주는 것 같나? 무한의 영역을 인간이 어떻게 감히 건드리겠나. 인간의 힘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 무슨 답을 찾겠다고 저러는지. 그를 둘러싼 수군거림은 점차 거세졌고 마침내 카게야마는 혼자가 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그를 걱정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철저한 고독이었다. 온전히 외톨이가 된 그가 조만간 미쳐버릴 것은 자명했다.
적어도 카게야마 토비오를 밖에서 보는 이들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니까, 쿠니미 아키라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는 늘 카게야마와 함께했으나 그 스스로 존재를 밝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가 카게야마와 어떠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만 카게야마가 홀로 무한을 연구할 때에 그 옆에 있었을 뿐이다. 그가 카게야마의 세계를 이해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지는 두 사람에게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이 서로에게 지닌 감정의 깊이였다.
“너를 사랑해.”
카게야마 토비오는 쿠니미 아키라를 사랑했다.
“증명해봐.”
쿠니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 똑바로 보고, 카게야마. 손으로 카게야마의 턱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쿠니미의 목소리에서는 즐거움이 묻어났다. 정말 나를 사랑하면, 증명해봐. 그게 네가 하는 일이잖아. 카게야마의 귓가에 입술을 댄 쿠니미는 나지막이 중얼거린 후에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숨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지자 카게야마는 얼굴을 붉힌 채 놔 달라며 몸을 바르작대었다. 싫어. 약속해, 증명한다고. 이제는 웃음기마저 배어 들어간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눈을 꾸욱 감았다. 그건 증명 못 해, 수학이 아니잖아. 빠르게 말하는 것에 쿠니미는 즐겁기 그지없다는 듯이 카게야마의 귓바퀴에 입술을 눌렀다가 떼었다. 순식간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온기에 카게야마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증명하는 법, 알려줄까.“
질문이라기보다는 선언이었다. 쿠니미는 고개를 움직여 카게야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은근한 들뜸이 묻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또 다시 눈을 피했다. 나 봐, 카게야마. 제법 엄하게 하는 말에 카게야마는 간신히 눈을 들어 쿠니미를 보았다. 쿠니미는 한 쪽 입꼬리를 슬쩍 들었다. 나한테 키스해. 무덤덤하게 뱉어진 말에 카게야마는 멍하게 눈을 끔벅였다. 뭐? 반문하는 그에게 쿠니미는 재차 무표정하게 말했다. 키스하라니까. 그럼 증명 끝인데. 카게야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엉터리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쿠니미는 짐짓 기분이 상한 체를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엉터리라니, 내가 고심해서 알려주는 건데. 이 정도 증명은 해야지, 천재 수학자님.
“안 그러면 소문낼 거야. 이렇게 간단한 증명도 못 한다고.”
장난기가 가득한 말에 카게야마는 결국 눈을 세게 한 번 꾸욱 감았다가 떴다. 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결의 비슷한 것이 담긴 어조로 말한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쿠니미의 양 볼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비장하게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그는 이내 눈을 감고 무작정 제 입술을 쿠니미의 입술 위에 대었다가 빠르게 떼었다. 됐지? 묻는 카게야마에게 쿠니미는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반쪽짜리 증명이야, 카게야마. 실망인데. 귓가가 붉게 물든 카게야마가 꽤나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쿠니미는 팔을 뻗어 카게야마의 뒷목을 그러잡았다. 그러고는 그 얼굴을 제 쪽으로 바싹 당긴 그는 가만히 속삭였다.
“이게, 진짜 증명.”
맞닿은 입술 사이로 숨이 오갔다. 쿠니미는 잠시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다가, 혀를 내어 카게야마의 입술을 두드렸다. 살짝 벌어진 틈 속으로 침투한 것은 입 안을 맴돌았다. 이를 건드리고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 유영하는 혀를 따라잡지 못하는 카게야마의 모습에 쿠니미는 만족감을 느꼈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릴 때쯤에 쿠니미는 입술을 떼었다. 숨을 몰아쉬는 카게야마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쿠니미는 그 모습도 제법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 말이 저렇게 자극적이었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한의 연구는 끝을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빌려와 접목시켜 보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방향에서 접근해보려고도 했으나 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일은 점점 괴로워졌다. 마치 무언가가 제 머릿속을, 제 마음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책상 앞에 앉아 한숨을 내쉴 때마다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지만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울음을 부르기도 했다. 쿠니미, 나 더 못하겠어. 하고 싶은데, 더 할 수가 없어. 단순하기 그지없는 언어로 속을 털어놓는 카게야마에게 쿠니미는 다만 가볍게 입을 맞출 뿐이었다.
“환청이 들려, 쿠니미.“
멍한 표정으로 말하는 카게야마에게 쿠니미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카게야마. 그러나 카게야마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괜찮지 않아, 내가 미쳐간다는 증거라고. 머리를 부여잡은 카게야마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 공허하기만 했다. 쿠니미는 그런 카게야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카게야마. 네가 미쳐간다니. 엉뚱한 말을 하는 것에 카게야마는 조금 화가 나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다행인데? 내가 미쳐가는 게 다행이야? 날 사랑한다며. 네가 사랑하는 내가 미쳐가는 게 다행이야?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는 카게야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쿠니미는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널 사랑한다고? 묻는 말에 카게야마는 입을 헤 벌렸다가 다물었다.
“날 사랑하지 않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카게야마에게 쿠니미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한 적이 없어, 카게야마. 평이한 어조의 말에 카게야마는 눈을 매섭게 떴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를 바라? 반문하는 것에 카게야마는 어찌할 줄 모르고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멍한 눈동자에 충격 비슷한 것이 어렸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정신없이 떨리는 목소리는 볼품없었다. 쿠니미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그건 아니야, 나는 너를 사랑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사랑 고백이었다.
“나는 그래서 네가 나만큼 미쳤으면 좋겠어.”
널 사랑하니까, 너도 나처럼 미쳐버려서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다시 단조로워진 말투로 쿠니미는 속삭였다. 죽고 싶지 않니, 카게야마? 고통스럽지 않아?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지 않아? 타이르듯 묻는 말에 카게야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만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세게 쥐었을 뿐이었다. 완전히 미쳤구나, 쿠니미. 카게야마의 말에 쿠니미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너도 이만큼 미치게 될 거야, 카게야마.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쿠니미는 떠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쿠니미를 필요로 했고, 점점 더 멍한 광기에 빠져들었다. 우울해, 쿠니미. 반복되는 수식들을 적어내리다가 입을 연 카게야마에게 쿠니미는 담요를 덮어 주었다. 추워서 그래, 가을이라서. 여전히 다정한 손길들은 카게야마가 버티는 힘이 되었지만 카게야마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쿠니미, 너무 아파. 어디가 아픈 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아파.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 텅 빈 눈동자로 중얼거리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 역시 쿠니미였다. 카게야마는 종종 그의 품에 안겨 울었다.
죽을까, 정말 죽어버릴까, 쿠니미.
그날은 비가 왔다. 거리에는 우산을 미처 가져 오지 않아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간만에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이튿날까지도 계속될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쿠니미와 카게야마는 바닥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투둑거리며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두 사람을 깨우지 못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비가 내려 카게야마의 책상 위 가득 쌓인 종이들을 적셨지만 쿠니미도 카게야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두 사람을 깨울 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빗줄기가 거세졌다.
- 증명 완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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