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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HQ

[시라쿠니] 붉은



*사약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시라우시 요소가 있습니다.





그건 쿠니미 아키라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하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기묘한 표정. 검은색에 가까운 고동색 눈동자에 담긴 것은 일종의 경멸인 동시에 애정이었다.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깊숙이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시렸다. 시라부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먼지라도 들어간 듯 불편한 뻑뻑함이 일었다. 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눈부신 해를 맨눈으로 보려 하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아아, 이런 건 싫은데. 어지러이 뒤섞인 생각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짜증스럽게 눈을 비볐다. 모래알이 잔뜩 들어간 것 마냥 까끌까끌한 느낌이었다. 여전히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시라부는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가지런히 정돈된 새카만 머리 아래로 눈가에 그늘이 졌다. 


“작작 해, 미친 새끼야.”

“뭘?”


담담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시라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토했다. 몰라서 물어? 되묻는 말은 짜증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니미는 여전히 잠잠한 얼굴이었다. 응, 모르겠는데. 답은 평이한 어조로 돌아왔다. 시라부는 눈을 깜박였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하, 모르겠다고? 기가 차다는 듯 내뱉은 중얼거림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손가락에 묶인 붉은 실이 눈에 들어왔다. 소지에 단단히 묶인 그것은 풀어낼 수도 끊어낼 수도 없게 매듭지어져 있었다. 시라부의 시선은 제 소지에서 시작해 복잡하게 얽힌 실을 따라 움직였다. 끝을 모르게 긴 실은 또 다른 소지에서 끝이 났다. 시라부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그 끝을 바라보았다. 쿠니미의 희고 얇은 손가락에서 붉은 색실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너 같은 게 내 운명이라니.”


실이 묶인 소지를 반대쪽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시라부가 문득 내뱉었다. 쿠니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게 좋진 않아. 속삭이듯 중얼거린 쿠니미에게 시라부는 또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안 좋으면 왜 그러는데. 툭 뱉은 말은 데구르르 굴러 쿠니미의 눈 앞에 떨어졌다. 쿠니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있잖아, 왜 우리한테만 이게 보인다고 생각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것이어서 시라부는 아아, 탄식을 내뱉었다. 멍청해 보인다면 보일수도 있을 반응이었다. 소지를 추켜세우고는 가볍게 흔드는 모양에 빛이 섞여들어 어지러이 흩어졌다. 시라부는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순간 몽롱해졌던 정신을 부여잡고 입을 떼었다. 머리에서 지끈지끈 통증이 일었다.


“우리, 라고 하지 마.”

“눈치 챘어?”


쿠니미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시라부는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짙게 썼다. 작작 하랬지. 날카로운 말에 쿠니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좀 아프네, 말이. 시라부는 듣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랬어? 역시나 중얼이듯 던진 물음에 쿠니미는 눈을 감았다. 무슨 뜻인데, 제대로 말해. 쿠니미의 말은 이전까지와 다르게 제법 단호했다. 시라부는 차마 대놓고 비웃음을 웃을 수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 경고하듯 말하고 짧게 숨을 쉰 시라부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우시지마 선배랑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선배 사물함에 칼날 가득 넣어둔 거, 너잖아. 애써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 누른 시라부의 말끝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쿠니미는 감았던 눈을 뜨고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나인 거, 알았어? 말에 잔뜩 묻은 것이 기쁨이라는 게 티가 나, 시라부는 몇 번이나 치미는 화를 누르고 또 눌러야 했다. 너 말고 그럴 사람이 또 누가 있는데? 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니미는 답을 고민하는 척 눈을 치켜 떴다. 그러게, 나 말고는 없네. 쿠니미의 말에 시라부는 입술을 씹었다.


“왜 그랬어?”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잖아.”


너는 내 운명인데, 네가 다른 사람을 보면 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지. 나른하게 말하는 쿠니미에게 시라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말했다. 아까는 네가 내 운명인게 그다지 안 기쁘다며. 의문스럽다는 어조에 쿠니미는 푸슷 웃고는 대답했다. 그래도, 일단은 그렇게 된 거니까. 


“나는 네가 나만 보면 좋겠어.“


너는 다른 누가 아니라, 내 운명이잖아? 쿠니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시라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실이 흔들렸다. 천천히, 하나, 둘, 셋. 흔들림이 멎었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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