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D/HQ

[오이카게] 수상한 로맨스


*우진(@ugeniee)님의 리퀘로 쓴 글입니다:)



수상한 로맨스




아직 해가 다 뜨지 못한 이른 아침, 온통 검게 차려 입은 한 남자의 인영이 문간에 발을 들였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새카만 선글라스와 깊게 눌러쓴 모자에 두터운 면 마스크까지, 신분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남자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주위를 흘긋흘긋 살피는 모습이나, 조심스레 옮기는 발걸음에서 불안한 태가 났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제가 제일 먼저 온 것임을 직감했으나 여전히 안심은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큰일이다,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해.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속삭이던 말을 재차 반복한 그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떼마다 발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꿋꿋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 그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물건을 집어들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내 그것들은 한 품에 안기기도 어려운 숫자가 되었다. 그는 간신히 스무 개를 쌓아 들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좋아, 일단 물건은 손에 넣었으니, 빠져 나가기만 하면 돼.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는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저를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자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아, 쉽지 않은 시간이 될 것 같네. 곤란하다는 듯 지어진 멋쩍은 미소는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혹여나 물건이 쏟아질까, 더욱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갔다. 자칫하면 정체를 들킬 수도 있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자 쪽에서 건넨 인사에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화답했다. 여자는 여전히 그를 미심쩍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그녀의 앞에 물건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자 여자는 조용히 개수를 세고 그녀 앞의 기계에 무언가를 입력해 넣었다. 몇 개의 버튼을 더 누르던 그녀의 입이 다시 열리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2만 5천 엔입니다.”

“아, 네.”


침착하자, 침착하자. 남자는 지갑을 뒤져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말하는 목소리는 이제 제법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여자는 카드를 긁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포스터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 그 단체 한 장 주시고 토비오로 열아홉 장 주세요. 남자의 주문에 여자는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열아홉 장 다 같은 멤버로 가져가시는 것 맞으세요? 당황스러운 것이 티가 나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 있나요? 반문하자 여자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부산스레 카운터 뒤의 통들을 뒤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시 숫자 세기가 시작되었고 남자는 조금 초조해진 듯 손을 바르작대었다. 이윽고 스무 개의 둘둘 말린 종이들이 남자의 품에 안겨졌다. 남자는 간신히 물건이 든 봉지와 포스터가 든 쇼핑백을 들고는 문으로 향했다. 안녕히 가세요,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는 성공이다,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다 샀냐?”

“아, 네.”

“얼른 타.”


새카맣게 선팅이 된 흰 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뒷자리에 짐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에 안 타? 운전석에서 튀어나온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가다가 떨어져서 구겨질까봐... 그의 말에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중요하냐, 그게? 묻는 말에 그는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봉지 속의 물건을 확인했다. 비닐로 싸인 까만색의 앨범이었다. 주황색으로 박힌 카라스노라는 글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를 벗었다. 다갈색 머리칼과 고동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 성공이다.”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슬며시 웃는 그는,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아이돌 그룹 아오바죠사이의 리더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그러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면. 


시작은 오이카와의 다리 부상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3집 활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는 단독으로 출연한 예능에서 다리를 접질렸다. 얼마만의 완전체 컴백인데, 리더가 갑자기 무대에 설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리니 회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최소 3주는 반깁스를 해야 하고, 적어도 한 주는 푹 쉬어야 한다는 진단에 결국 일주일간 휴식기를 가지고 그 다음 주부터 의자에 앉아 무대에 참여하기로 결정이 났다. 다리 팔아서 휴가 생겼네. 뚱하지만 걱정이 섞인 이와이즈미의 말에, 이와쨩은 우리 엄마예요? 하고 대답하고는 제대로 등짝을 얻어맞으며 오이카와의 일주일짜리 휴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휴가라고 해도 다리가 멀쩡하지 못하니 숙소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다. 완전체 컴백 전 솔로 활동에 드라마 촬영까지 하며 휴가다운 휴가를 받아보지 못한 것이 한참이었던지라 오이카와는 몸이 근질근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하루 온종일 TV 채널만 바꿔가며 뒹굴거리는 일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휴가라니. 물론 좀 쉬는 것도 좋지만, 쉬는 것도 정도를 넘어서니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 심심해, 심심해, 심심해! 마침내 휴가 3일째에 폭발한 오이카와는 아오바죠사이 단체 라인방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다들 뭐해? 오이카와 씨 심심해. 심심해 죽겠어. 심심해 죽겠다니까? 심심하다는 말을 한 스무 번쯤 하자 놀랍게도 쿠니미의 답장이 날아왔다. 어, 쿠니미쨩? 오이카와는 의외라는 생각에 메시지 내용을 살폈다.


‘이와이즈미 씨가 조용히 하고 무대 모니터링이나 하라고 전해 달래요.’


그래,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오이카와는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리더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야? 툴툴대면서도 이와이즈미가 시킨 대로 순순히 TV를 켰다. 오늘 음악 방송 하는 게 어느 채널이더라. 소파에 앉아 몇 번 채널을 돌리니 금방 음악 방송 현장이 보였다. 쿠니미가 라인에 금방 답한 것을 보아 아오바죠사이의 순서는 꽤나 많이 남아 있을 테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이왕 할 것도 없으니 시간이나 때우자는 생각으로 소파에 제대로 자리를 잡고 기대었다. 화면에는 신인으로 보이는 걸그룹의 무대가 한창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예쁘네.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소파 위에 널브러진 쿠션을 하나 잡아 껴안았다. 의외로 사람 얼굴을 외우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던 터라 늘 후배들, 특히 친하지 않은 신인들을 구별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다. 쟤네는 누구지, 전에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오, 얘네 잘하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오이카와는 이윽고 이어지는 MC의 멘트에 흐음,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은 요즘 대세! 검은 돌풍이라고 불리는 그룹이죠?”

“네, 각종 음원 차트에서 놀라운 역주행을 해낸 그룹! 카라스노의 무대입니다.”

“Black!”


요즘 대세라고? 차트 역주행? 카라스노라는 이름은 영 익숙지 않았기에 오이카와는 미심쩍다는 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MC들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어두운 조명 아래로 열 명의 인영이 드러날 때까지도 그는 별 생각 없이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내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무리의 한 가운데를 비추고, 한 멤버가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을 턱 벌렸다. 유려하면서도 탄탄한 몸선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독무와 어우러져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눈을 가린 까만 레이스 안대는 역시나 검은 빛의 의상과 함께 아슬아슬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를 풍겼다. 일 초가 일 분 같았다. 저런 애가 있었어? 할 말을 잃은 오이카와는 이내 천천히 안대를 푸는 손에 넋을 잃을 것만 같았다. 손도 예뻐, 감탄하던 와중에 드러난 것은 시리도록 푸른빛의 눈동자였다. 오이카와는 심장이 멎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꼬리가 올라간 눈가에 번진 것처럼 칠해진 붉은 섀도우가 묘했다. 새카만 머리칼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눈썹부터 말린 장밋빛 립스틱이 발린 입술까지 어디 하나 취향이 아닌 곳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순식간에 군무에 스며드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워 앉고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세상에, 쟤 누구야?


실력도 놀라웠지만 외모도 소름이 돋을 만큼 제 취향이었다. 열 명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멤버들 사이에서도 유독 빛이 났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의 춤을 바라보다가 그의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쿠션을 내던졌다. 아, 정말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춤도 잘 추면서 노래도 저렇게 잘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제가 이제까지 저런 사람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얼굴도 제 취향을 저격한 듯 딱 맞았는데, 여태껏 그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진심으로 놀라웠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MC들이 1위 후보 아오바죠사이를 소개하는 와중에도 오이카와는 초점 없는 눈으로 간신히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카라스노, 카라스노...”


아까 들었던 그룹명을 다급하게 포털 사이트에 검색한 그는 제가 어떻게 여태까지 그들을 모를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카라스노는 소형 연예기획사의 유일한 아이돌이었는데, 데뷔 초에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다가 한 팬의 직캠으로 인해 최근 급작스런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음원 차트를 역주행해 심지어 1위에 등극한 카라스노는 결국 극적으로 음악 방송에 재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오이카와가 보게 된 것이 바로 그 무대였다. 그럼 그 전설의 직캠은 도대체 뭐지? 오이카와는 사이트를 이동해 동영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다. 놀라운 조회수의 영상을 찾은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 아까 그, 그!”


오이카와는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 그 취향저격 걔잖아? 역시 사람 눈은 다 거기서 거기야. 생각한 오이카와는 홀린 듯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 진짜 최고다.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에 오이카와는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휘저었다. 안되겠다, 한 번 더 볼래. 오이카와는 정말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양 다시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한참 뒤에야 영상의 마성에서 간신히 벗어났을 때엔 이미 음악 방송은 끝난 지 오래였다. 아, 애들 무대 못 봤네. 1위는 했으려나? 뒤늦게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그는 다시 영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다, 딱 한 번만 더 볼래.


그러고는 꼭, 스무 번을 더 보고야 정신을 차렸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토비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그가 저도 모르게 외운 이름이었다. 영상을 보고 다시 검색을 하다가 카라스노의 절판되었던 데뷔 앨범이 재판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제일 먼저 앨범 사양을 확인했다. 포토북과 CD는 물론이요, 멤버별 랜덤 포토카드와 단체 버전 및 개인 버전이 있는 포스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 이건 사야 해. 이건 사야 한다. 가서 단체 포스터 딱 하나만 받고 나머지는 다 토비오 포스터 받아야지. 그러나 도저히 인터넷에서 주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저 대신 다른 사람이 택배를 받고는 저를 강제로 ‘일코해제’ 시킬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츠카와나 하나마키가 받으면 분명 평생 놀림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고, 이와이즈미가 받는다면 무슨 꿍꿍이냐며 한참을 추궁당할 것이 분명했다. 동생들에게 들켰을 때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결국 그가 택한 방식은 음반 판매점의 오픈 시간에 찾아가 빠르게 딱 스무 장을 사오는 것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살금살금 다친 다리를 끌고 나가려다 매니저에게 정통으로 걸려 버리고 말았지만.


“어디 가? 다리도 안 멀쩡하면서.”

“형, 제가 뭐 살게 있어서요....”

“이 새벽부터? 뭘?”


우물쭈물하는 오이카와에게 매니저가 물었다. 불법적인 건 아니지? 그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매니저는 그런 오이카와를 슬쩍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니까 믿는다. 태워다 줄 테니까 좀만 기다려.”

“아, 그러실 필요까지는...”

“조용히 해. 그 다리 하고 어디 가려고.”


그렇게 매니저와 잠시 실랑이를 하고, 수상쩍기 짝이 없는 과정을 거쳐 얻은 것이 스무 장의 카라스노 데뷔 앨범이었다. 오이카와는 숙소에 돌아와 앨범들과 포스터들을 바닥 한 구석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리더의 특권으로 독방을 쓰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오후 늦게야 스케줄이 잡혀 있던 터라 다행히 멤버들은 아침 열 시가 넘어가도록 잠에서 깨지 않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먼저 단체 버전 포스터를 펼쳤다. 아, 토비오 엄청 잘 나왔네. 카게야마에게 반쯤 기댄 것처럼 찍힌 주황색 머리의 멤버가 영 신경 쓰였지만 어쨌든 카게야마가 예쁘게 잘 뽑혔으니 만족이었다. 


그 다음으로 펼쳐진 것은 카게야마의 개인 포스터였다.


“아, 대박. 미쳤다.”


데뷔 앨범에 포함된 포스터이니 분명 데뷔 전에 찍은 사진일 터였다. 그러나 마치 날 때부터 아이돌이었다는 듯한 표정과 포즈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저 얼굴, 얼굴! 정말 열일하네, 얼굴 천재다. 지난 며칠 간 밤을 새며 카라스노의 팬페이지들을 훑어보던 중 알게 된 새로운 말들을 마구 써가며 오이카와는 포스터를 조심스럽게 다시 말았다. 찢어지거나 너덜너덜해질 일이 없으려면 지관통에 담아 놓는 게 좋다던데. 하루 빨리 지관통 스무 개를 주문하겠다고 다짐하며 오이카와는 포스터들을 방 한쪽 구석에 정리해 놓았다.


포토북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슬며시 앨범 한 장의 비닐 포장을 뜯었다. 포토북의 표지는 단체 사진이었다. 아, 여기도 토비오 예쁘게 잘 나왔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오이카와는 포토북을 서너 페이지 넘겨보다가 또다시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 이게 말이 돼? 눈에는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을, 입술에는 선명한 레드 립을 바른 모습은 말 그대로 치명적이었다. 이 앨범이 이제야 이렇게 빛을 받다니, 이게 말이 돼?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토북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가 중간에 무언가 껴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들었다. 앞면에는 사진이, 뒷면에는 사인이 들어간 작은 카드였다. 아, 포토 카드네. 그가 잘 모르는 멤버의 사진이었기에 오이카와는 그것을 다시 앨범 사이에 끼워 넣었다.


“나 토비오 포카 갖고 싶은데.”


혼자 중얼거리며 오이카와는 나머지 열아홉 개의 앨범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깔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다음번에는 꼭 토비오가 와줄 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드디어 마지막 앨범의 포장을 깐 그는, 하필이면 아까 단체 포스터 사진에서 카게야마의 옆에 붙어 있던 주황색 머리 멤버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베개를 집어던졌다. 어떻게 한 번도 안 나올 수가 있어? 이게 말이 돼? 나 스무 장 샀는데? 허탈한 마음에 오이카와는 헛웃음을 웃었다. 아 정말, 내가 다음번엔 서른 장 사온다.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그렇게 절반은 지루함으로, 절반은 덕질로 가득 채워진 일주일간의 휴가가 끝났다. 오이카와는 다음날 음악 방송부터 복귀해 무대에 서게 되었다. 카라스노의 팬페이지며 팬카페를 살펴보는 데에 제대로 맛이 들린 오이카와는 대기실에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어, 오늘 카라스노도 이 음방 나오네. 뜻밖으로 겹치는 스케줄이 있었다니, 오이카와의 마음은 갑자기 기대감으로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잘 하면 토비오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심코 한 생각은 깊이 뿌리를 내려 이내 온 마음을 감쌌다. 토비오 만날 수 있을 지도 몰라, 실물 정말 궁금한데.


그 순간 들려온 것은 의문의 노크 소리였다. 누구지? 아오바죠사이가 단독으로 쓰는 대기실이었기에 다른 누가 찾아올 일은 적었다. 오죽하면 오이카와마저 뚫어질 듯 보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킨다이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카라스노였다.


“안녕하세요! 카라스노입니다.”


전혀 의외의 인물들이 등장하자 대기실이 묘한 어색함으로 푹 가라앉았다. 오이카와는 그 와중에도 카게야마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열 명의 멤버 가운데 눈에 띄는 동그란 머리통이 보이자 그제야 오이카와는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음방, 앨범, 데뷔, 신인... 이런저런 단어들이 들려왔지만 오이카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카게야마 토비오 뿐이었다. 실물도 취향이네, 피부 엄청 좋다. 볼 꼬집으면 말랑할 것 같아. 걸러지지 않은 생각들은 마구마구 쏟아져 하마터면 입 밖으로까지 튀어나올 뻔 했다. 정말 간만에 제대로 취향 저격인데, 좀 꼬셔보면 안되나?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은 머릿속에서 부유하며 점점 구체적이 되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첫눈에 반한 것 같은데, 나. 오이카와는 카라스노 리더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오직 카게야마에 대한 생각만을 이어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네? 아, 네.”


할 말이 끝났는지 고개까지 숙여가며 인사를 하는 카라스노의 리더에게 오이카와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로 답하고야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으레 짓던 다정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내 카라스노는 앨범 한 장을 선물하고 무대를 준비하러 떠났다. 아, 토비오 더 보고 싶었는데. 오이카와는 아쉬운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앨범을 보았다. 이거 숙소에 스무 장이나 있어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기어이 비닐을 벗겨 확인을 하던 오이카와의 모습을 훗날 쿠니미 아키라는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무슨 금광 찾은 줄 알았어요. 정말 입이 찢어지게 웃어서.”


그도 그럴 것이, 오이카와 토오루는 결국 카게야마 토비오의 포토 카드를 뽑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카라스노가 직접 선물한 앨범에서 말이다. 이거 번호 따라는 거 맞지, 이거 운명인 거 맞지? 잔뜩 들뜬 오이카와는 멤버들 몰래 포토카드를 살살 매만졌다. 토비오, 내가 지금은 이렇게 네 사진만 만지작대고 있지만, 언젠가는 네 손을 잡는 사람이 되고 싶어. 마음속에 채워지는 말을 곱씹던 오이카와는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지금 번호 따러 가니까, 다들 응원해줘야 해! 뜬금없는 폭탄 발언만을 남기고 절뚝이며 대기실을 나가 버린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보며 멤버들은 다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고 오려고 그러나.


아직 이 마음이 단순한 팬심인지, 연애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이카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건 차차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토비오가 좋다는데 그거 말고 또 뭐가 중요해? 카라스노가 있을 대기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경쾌하게 비틀거렸다.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계절이었다.





'2D > HQ'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카게] 어려운 로맨스  (0) 2017.01.09
[우시카게] 비밀 연애가 어려운 이유  (0) 2017.01.01
[카게른] 단문 모음  (0) 2016.12.26
[시라쿠니] 붉은  (0) 2016.12.26
[카게른] 조각글 백업  (0) 2016.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