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니카게] 얼음
눈과 얼음뿐인 새하얀 땅 위에 검은 것은 오직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흐릿한 두 눈동자뿐이었다. 어디일까, 여기는. 소년은 두어 번 눈을 끔벅이다가 이내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 위로 걸음을 놓았다. 자박자박 눈을 밟으며 걷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퍼졌다. 때마침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살 속까지 파고들었지만 소년은 텅 빈 눈동자를 들지 않았다. 목적지가 없는 느릿한 걸음을 걸으며 소년은 가슴 한 구석에 기이한 불편함이 맺혀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또 하나의 검은 것이었다. 의미도 형체도 알 수 없는 그 새카만 무언가를 소년은 토해내고 싶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갈라지고 바스라지는 소리의 덩어리들이어서 소년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가다듬은 목소리로 의미 없는 어절들을 반복해서 내지르던 소년은 결국 하나의 단어를 완성시켰다.
카게야마.
낯선 단어였다.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말이었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소년은 입 안에서 그것을 굴리며 곱씹었다. 이상하게 그리운 느낌이었다. 소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 암흑 속에서 푸른 빛이 점멸하다 사라졌다. 기묘하지만 아름다운 빛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더 보고 싶어. 어린 아이와 같은 고집스런 투로 생각이 뻗어나갔다. 눈을 뜨자 다시 백색의 세상이 보였다. 소년은 다시 그 푸른 빛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재차 눈을 감았지만 이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카게야마’ 일까? 대답해 줄 이가 없었기에 물음은 허망하게 얼어붙었다. 찾고 싶어. 중얼거린 소년은 다시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에 묻은 눈이 얼음 위에 그림자처럼 흔적을 남겼다.
[마츠카게] 사탕
“사탕 먹을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마츠카와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막대사탕을 꺼내 소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손바닥에 놓인 사탕의 보라색 껍데기를 응시하던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하는 말에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뭐? 오히려 반문을 던지자 소년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지더니 눈을 몇 번 더 깜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인간의 음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년의 파란 눈이 손에 쥐어진 막대사탕과 마츠카와의 얼굴을 오가며 굴렀다. 응, 그것도 알지.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의 마츠카와를 소년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이 응시했다. 그런데 왜 이런 걸 주십니까? 덤덤한 말투였지만 마츠카와는 왠지 목소리에서 떨림이 묻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글쎼, 왜 주는 걸까.
“맛은 느낄 수 있다며?”
“엄밀히 말하자면 미각이 있다기보다는 전기 신호로...”
“어쨌든, 맛은 안다는 거 아니야.”
복잡한 얘기는 관두고, 먹으면 무슨 맛인지 아는 건 맞지? 재차 확인하는 마츠카와에게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먹어. 인간은 단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지거든. 또 한 번 씨익 웃어 보인 마츠카와는 소년이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재빨리 소년의 손을 잡았다. 손을 오므려 소년의 손이 사탕을 완전히 감싸도록 만든 마츠카와는 꼭 먹어, 하고 또 한 번 당부하고는 손을 떼었다. 그럼 이만. 마츠카와는 낮게 중얼거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 걸었다.
역시, 기억을 리셋당했군. 한숨을 내쉰 그는 피투성이의 소년이 홀로 돌아왔던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아군은 소년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지만, 피칠갑을 한 그 모습은 정말... 마츠카와는 고개를 가로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네가 인간이 아닌 게 차라리 다행일까. 나는 아무것도 네게 해줄 수 없으니. 착잡한 마음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탕이 담겼던 빈자리가 이상하게 컸다.
[오이카게이와] 키타이치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바람이 많이 차네요. 이 계절 즈음이 되면 저는 오이카와 씨 생각이 자주 납니다. 제가 오이카와 씨에게 고백을 했던 것이 이때 즈음이었으니까요. 오이카와 씨가 거절한 것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이카와 씨에게 편지는 수도 없이 썼지만, 단 한 번도 보낸 적은 없으니 오이카와 씨가 제 근황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저는 이와이즈미 씨에게서 오이카와 씨 이야기를 몇 번 들었습니다. 고교에서도 중학 시절처럼 여전히 잘 지내신다고 하시더군요. 조금 속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기적이게도 말입니다. 그러나 오이카와 씨가 잘 지낸다니 저는 기뻐해야 하는 게 맞겠지요.
이와이즈미 씨는 상냥합니다. 제가 오이카와 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이 제게 연인이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그러나 중학 시절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게 이와이즈미 씨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교집합인 중학 시절은 결국 오이카와 씨로 가득 차 있어서, 어떻게 해도 결국 어색해지고 맙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이지만, 아니 애초에 이와이즈미 씨의 옆에 있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짓이지만, 저는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으니까요. 그것이 오이카와 씨의 사랑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 저는 다만 이렇게 보내지 못할 편지들만 적어내릴 뿐입니다.
내가 기어이 사랑하고 말 사람, 봄이 되면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오이카게] 정장
“불편합니다, 오이카와 씨.”
카게야마는 입술을 주욱 빼물고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불편하다니까요. 퉁명스럽게 말해 보아도 오이카와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 떠 있었다. 아아, 역시. 오이카와 씨 안목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만족스럽다는 투로 말한 그는 카게야마에게 바싹 다가가 조금 흐트러진 셔츠 칼라를 잡아당기며 정리했다. 토비오쨩 무신경한 것도 알아줘야 하고. 제 얼굴 바로 앞에서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보던 카게야마는 슬쩍 얼굴을 붉혔다. 손을 바르작거리며 잠시 고민한 그는 결국 바닥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느닷없는 말에 오이카와는 옷 이곳저곳을 바로잡아 주던 것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 대신 새카만 정수리를 보이고 있는 제 사랑스러운 연인에게 오이카와는 결국 큰 소리로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고 있을까, 토비오쨩?”
“...모릅니다.”
“그래? 오이카와 씨는 알 것 같은데?”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턱을 잡았다. 토비오쨩, 나 봐야지. 간신히 고개가 들린 카게야마는 애써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보았다. 어허, 오이카와 씨 보라니까? 엄하게 말하는 오이카와를 이기지 못한 카게야마는 결국 한 쌍의 다갈색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토비오쨩, 얼굴 엄청 빨개. 오이카와가 던진 말에 이 와중에도 입술을 비죽이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왜 그렇게 얼굴이 토마토가 되었을까? 모르는 체 질문을 던지는 오이카와가 야속하기 그지없었지만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멋있으셔서요.”
아아, 이 사랑스러운 꼬맹이를 어떻게 하지. 오이카와는 참지 못하고 카게야마를 품속으로 잡아끌었다.
[오이카게] 악순환
“저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굴 필요 없어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너를 돌아보았다. 새파란 시선이 나를 꿰뚫듯 지나쳤다. 나는 온통 얼어붙은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잠시 말을 잊었다. 무슨 뜻이야? 간신히 언어를 되찾고 뱉은 질문에 너는 도리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귀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오이카와 씨? 무덤덤한 물음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으나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는 뭐지?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거부한다. 우리는 입을 맞추고 밤을 함께 보내지만 연인은 아니다. 그럼, 그럼 우리는 뭐지. 고민에 잠겨 멍한 눈을 한 나의 말끝을 네가 붙잡아 잇는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단호하게 하는 말에 나는 조금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알았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수긍하듯 중얼거리자 너는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상하게 슬퍼 보이는 네 어깨를 토닥이고 싶었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또 한 번, 지독한 악순환이다. 너를 사랑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나와 그것을 무시하려 애를 쓰는 너.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숨기고 너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외면한다. 반복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기에는 눈앞이 너무도 깜깜하다. 가슴 한 구석이 답답했다. 나는 결국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카카게] 냉정
“헤어지자.”
차갑기 그지없는 어조였다. 소년은 방금 제가 들은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카아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카아시 씨. 늘상 푸르게 빛나던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 흐릿했다. 아카아시는 애써 침착을 되뇌이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만 하자고, 카게야마. 냉정하게 떨어진 말은 무섭도록 힘이 셌다.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들을 머금은 공기는 무겁게 추욱 늘어졌다. 소년은 눈을 깜박였다. 인형이 눈을 깜박이는 것 마냥 감정이 없는 눈짓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소년에게 아카아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년에게서 등을 돌릴 뿐이었다. 소년의 멍한 두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마저 전염되듯 속이 텅 비어버릴 것 같았다.
“날 사랑하지 않아요?”
뒤로 돌아선 그에게 소년은 담담한 듯 절박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소년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면 애써 덮어쓴 냉정의 가면이 벗겨질 것만 같았기에. 차라리 소년을 사랑하지 않았기를, 한 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기를 그는 바랐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가슴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아카아시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미련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졌으나 그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발목을 붙잡고 끈적하게 늘어지는 후회는 늪과 같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가장 아픈 것은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타오르는 사랑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너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는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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